[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박홍기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 얼마 전에 갑자기 연락을 해왔습니다.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열다섯 해 전이라 너무 반가웠는데, 미리 연락도 없이 잠시 고국에 들른 이유가 좀 무거웠습니다. 어머니께서 전에 위암 수술을 받으셨는데 이후 암이 재발했고, 현재는 병원에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잠시 귀국한 김에 얼굴 좀 보자고 연락을 한 것보다 더 현실적인 부탁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베네딕다(분다)라는 세례명의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띠 동갑 위의 남편과 결혼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셨는데, 시어머니께서 성당에 나가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성당에 발을 들이지 않기 시작하셨는데, 그렇게 꽤 오래 지내시게 된 것이지요.

이제 어머니께서 떠나실 때가 된 것을 느낀 친구는 제게 그분의 병자성사〔예전엔 마지막을 돌본다는 의미 때문이었는지 ‘종부성사(終傅聖事)’라고도 불렸습니다〕를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혼수상태로 빠지시기 전에 달려갔습니다. 진통제 때문에 눈은 거의 감으신 채, 말을 못하시는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병자성사 끝부분에 성체는 영하실 수 있었습니다.

친구의 집안에서 가톨릭 신자라고는, 구교 집안에서 자라신 어머니와 나중에 직장 다니며 세례를 받은 누님, 이렇게 두 사람뿐입니다. 친구 중에 사제가 된 저를 은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제 친구는 아직 어떤 신앙도 가지려는 기색이 안 보입니다. 아무튼 친구 어머니의 병자성사 때문에 신자인 누나도 뵙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누나도 언젠가부터 쉬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발단은 당신의 신앙생활이 그냥 의무감으로 지탱될 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어느 순간 발을 끊었다고 하셨습니다.

적잖은 분들이 그런 이유로 장기 휴식에 들어섭니다. 성당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다가 오히려 사람들과 일에 지쳐버려 냉담을 하게 되는 분들과는 정반대로 말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교회 내의 다양한 신심 활동(기도 모임, 성경 모임 등)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가는 작업이 수반됐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고, 후자의 경우는 일에 치이지 않도록 활동 리듬을 조절하는 것과 영혼을 위한 배려가 아쉽습니다. 즉, 정기적으로 피정 등을 통해 심신을 쉬면서 기도의 재미를 북돋아주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냉담자가 되는 데도 일정한 기준이 있다는 거 아세요? 한국 교회는 특성상(무슨 특성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선교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그런 이유로) 한 해에 두 번, 판공성사(고해성사인데 부활과 성탄을 앞두고 하는 것)를 하도록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최소한 1년에 두 번 판공성사를 보고 판공성사표를 본당에 제출하게 됩니다. 이런 제도적인 판공성사를 여섯 번, 즉 3년 이상 보지 않았을 때, 그를 쉬는 교우(냉담자)라고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판공까지 가지 마시고 평소에 고해성사를 보시는 습관을 들이는 게 바람직해 보입니다. 판공은 그렇게 하기 어려운 분들을 위해 마련된 제도적 장치라 할 것입니다. 고해성사가 쉽다는 분들은 많지 않으니, 판공이 좋은 제도겠죠? 그나저나 냉담권에 든 분들이 속풀이를 얼마나 읽으실지 모르겠으나, 꼭 3년이 지나지 않았다 해도 하느님을 알고자 하는 갈증이 별로 없다면 일단 어느 순간 신앙의 끈을 놓아버릴 수도 있으니 깨어 계시기 바랍니다.

쉬는 교우들 중 적잖은 분들이, 자신이 하느님을 만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포자기하는 내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러한 ‘나’이기에 하느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다면서 주저앉아 있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가 당신께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소속 성당이나 지역 교회에 대한 원망 때문에 성당에 발을 끊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부활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부활에 함께 동참하겠노라 희망하라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의 모임입니다.

게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요즘은 가난한 이들, 사회로부터 배제된 이들을 위한 교회로 쇄신하려는 모습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지 않나요? 다시 마음의 불을 밝혀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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