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여경]

2014년, 올해로 채식을 시작한 지 3년이 된다.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사이 채식의 범주와 기준이 많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비건(동물성 식품을 전혀 먹지 않는 채식주의)으로 시작했다가 몇 달 후에는 락토(유제품은 먹는 채식주의)이면서 사람들과 외식할 때는 계란과 해산물을 허용하는 것으로 기준을 바꾸었고, 지금은 오보(달걀 섭취)와 페스코(해산물 섭취) 사이쯤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채식인들이 조금씩 동물성 식품을 섭취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과 반대로 나는 기준을 낮추어온 셈이다. 엄격한 비건주의가 더 훌륭한 채식이고, 오보 · 페스코는 덜 훌륭한 채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신념과 여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점점 기준을 낮춰온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요즘 스스로가 채식을 하는 태도를 돌아보면 올바르게 하고 있지 못한 것처럼 느껴져서 고민이다.

그렇다면 채식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단순히 기준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절대 허용하지 않으면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아닐 테다. 오히려 그렇게 ‘고기를 먹지 않음’을 고집하였을 때 본질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 가령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서 이미 나에게 주어진 음식에서 고기만 빼서 버리는 경우는 채식이라기보다는 편식에 가깝다. 누군가 그것을 먹어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그 고기들은 다 버려지게 된다. 어떻게 만들어진 고기인데!

만일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채식을 하는 본질적 목표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가 채식을 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육류의 대량생산-소비 과정에서 벌어지는 동물에 대한 윤리적이지 못한 행태들과 그러한 생산구조로 인해 소외되는 빈곤계층에 대한 문제의식에서였다. 즉, 내가 채식을 함에 있어서 중요해지는 것은 고기를 안 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반대하는 방식을 거쳐 생산된 제품을 소비하기를 거부하는 게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고기를 먹기도 했는데, 고기가 주식인 유목민이 대부분인 티베트에서 고기를 먹었고, 농활을 갔던 곳에서 촌장님이 수고했다며 대접해주셨던 닭백숙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종종 연대활동을 하는 중 식사로 제공받은 김밥에 햄이 들어있으면 그냥 먹기도 했다.

그러니 내가 요즘 채식을 잘못하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 것은 고기를 먹게 되는 상황들 때문이 아니라, 채식을 시작하게 된 문제의식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 잘못된 습관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가까이에 있는 편의점을 자주 사용하면서 거기서 파는 가공식품을 소비한다거나,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빵을 많이 사먹는다거나 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이다.

ⓒ여경

먹거리의 문제는 단순히 입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의 문제도 포함하기 때문에, 채식을 한다는 것도 음식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재료가 길러지는 과정에서부터 가공, 유통되는 과정까지 모두 생각해야 마땅하다. 따라서 대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대형마트들을 이용하는 것을 줄이고,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식품들을 멀리하고, 마을의 작은 가게나 생협 제품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도시라는 공간과 그 속에서의 삶의 방식은 그런 소비가 불가능하게 짜여 있다는 사실이다.

도시의 삶은 얼마나 팍팍하고 빡빡한지, 세 끼를 부지런히 요리해서 먹으려면 굉장히 많은 노력과 희생이 요구된다. 간단히 금방 먹어치워야 바쁜 일들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먹을 수 있는 가공식품이나 패스트푸드를 찾게 된다. 그리고 식재료를 사러 간다고 해도 대형마트와 편의점이 워낙에 구석구석 침투해 있는데다 늦은 시간까지 운영하다보니 접근성에 있어서나 운영시간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한다. 때문에 그곳을 이용하지 않기란 정말 힘들다.

그에 비해 생협 매장은 많지도 않고 매장 운영시간도 짧으며 또 조금 비싸다. 특히 가격의 문제는 생협을 이용하는 것이나 채식을 하는 것이 마치 비싼 유기농제품을 고집하는 것처럼, 먹거리에 계급을 나누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생협 제품의 가격은 합리적이다. 동물들을 학대하지 않고 우유나 달걀을 얻어내기 위해 필요한 시설과 과정을 생각하면 그 정도 가격은 적당하게 느껴진다. 그런 과정을 상상해보면 대형마트에서 제시하는 가격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오히려 이상하다.)

이처럼 바른 먹거리에 대한 고민은 다시 도시라는 공간, 그 안에서의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이어진다. 도시라는 공간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혹은 무력화시키는 무수한 대안적인 삶의 방식들이 참 많다.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했듯 채식도 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단순히 고기를 안 먹으려는 채식주의자에게도 편의점이나 프랜차이즈 빵집 등에서 파는 음식들은 대부분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성분표를 살펴보면 동물성이 포함되지 않은 걸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편의점에서 파는 ‘야채죽’에도 닭육수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인지 채식을 한다고 하면 종종 듣게 되는 말이 “그렇게 따지면 먹을 수 있는 게 없어”라는 말이다. 맞다. 정말 없다. 특히나 도시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이 기른 작물이 아니고서는 완전히 맘 놓고 먹을 수가 없는데, 도시에서는 그렇게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손에 닿는 대로 가깝고 간단한 것을 먹게 된다. 바빠지고 돈이 없어질수록 더하다. 그러다보면 채식을 제대로 못할 뿐만 아니라 건강의 측면에 있어서도 타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몇 번이고 채식을 그만둘까 고민했다. 주변 사람들이 건강 걱정을 계속 하시면서 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하기도 하고, 스스로도 이렇게 채식을 할 바에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노력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나는 좀 더 해보려고 한다. 엄격해져서 본질을 흐리게 되는 것도 문제지만, 또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면서 ‘완벽하지 않으니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도 좋은 결론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도시가 나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작은 부분에서라도 조금씩 노력하면서, 점차 그 범위를 늘려가는 것이 진짜 채식을 하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서 조금이라도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 기쁘지 않을까. 그게 채식이 되었건,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되었건 꾸준히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여경 (요안나)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생. 삶, 사람, 꽃, 벗, 별, 꿈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울림이 예쁜 말들에 이끌려 국어국문학과에 가게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이를 위해 문학과 예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 시와 음악과 그림, 나무, 물이 흐르는 공간,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향 바다를 닮아 평온하고도 깊고 강인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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