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17]

▲ 1977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카라얀
카라얀(1908~1989)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그의 독특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연주 시간이 한 시간이 넘는 긴 교향곡의 악보를 통째로 암기해서 지휘하는가 하면, 리듬과 음색을 중요시하면서도, 곡의 해석에 있어서 큰 흐름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버리기도 하는 그의 결단력 있는 곡 해석과 더불어, 시종일관 눈을 감고 진지하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가 추구하는 음악이란 유현(幽玄)한 세계가 어떠한 것일지 감이 올 때가 있습니다.

“카라얀은 연습을 철저히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악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지독할 정도로 철저했다. 오죽했으면 곡 전체를 암기했을까. 카라얀이 리듬과 음색에 중점을 두고, 작곡자의 동기와 표현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탓에 그의 곡 해석은 어딘가 모르게 추상적인 분위기를 빚는다.” (페터 윌링 지음, 김희상 옮김, <불꽃의 지휘자 카라얀>, 21세기북스, 9~10쪽)

카라얀이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두 팔을 거의 모으다시피 하고 한 손만으로 조그맣게 지휘를 할 때마저,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연주자들은 그가 의도하는 대로 소리를 내기 위해 집중하고 긴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럴 때 그는 오랫동안의 연습과 리허설을 통해 만들어낸 소리를 무대 한가운데서 지휘하면서 음미하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기술적인 정확도와 곡의 충실한 해석으로 음악에 있어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는 토스카니니나, 관객과의 소통이라는 문제를 아주 중요시했기에 똑같은 곡을 매번 다르게 들려주었던 푸르트벵글러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존재가 잊힐 수도 있었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두 거장과는 또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 갔던 카라얀.

그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동작만 바라보고 있어도, 그가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어떤 점을 중요시하고 강조하는지 청중들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성악과 기악이 어우러진 한 시간이 넘는 오페라 곡도 단 5분으로 압축시켜 머릿속에 기억할 수 있었다는 카라얀.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진지하고 엄숙하다 못해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껴진다고 하지요.

하지만 히틀러 집권 당시, 아헨 시(市)의 음악감독을 맡기 직전에 카라얀이 나치당에 입당했었던 과거 전력을 두고 전후에 논란이 많았습니다. 사실관계가 어떠하든, 전쟁이 끝나고 나서 카라얀은 연합국 당국의 규제에 묶여 대중 앞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즈음 한 음반 제작자가 카라얀에게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음반 녹음을 제안했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음반 제작에 참여합니다.

세세한 부분들마저 전체 속에서 안정적인 구도를 갖게끔 절제되어 있는 카라얀의 지휘는 음반의 미학에 적합했기에, 역설적으로 그는 다른 지휘자들과 구별되는 독특하고도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자진해서 대중 앞에 나서거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후 평생 동안 음반이나 영상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게 됩니다.

1947년이 되어 당국의 규제에서 풀려난 카라얀은 음반 녹음을 계속하면서 대중 앞에서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1955년에 베를린 필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취임합니다.

카라얀은 나이 들어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가운데, 고집스러운 성격으로 인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많은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예순여덟 살에 심한 허리 통증으로 큰 수술을 받았던 것을 비롯해서, 신장 결석으로 고통을 받았고, 그로 인해 즐기던 운동을 하지 못해 괴로워했으며, 뇌졸중이 찾아와서 신체 활동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특히 말년에 단원들의 반발로 인한 갈등으로 괴로워하다가, 34년 동안 군림했던 베를린 필의 종신 음악감독직을 사임한 해인 1989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카라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카라얀이 음반과 영상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널리 알렸고, 사람들로 하여금 연주회장을 찾지 않더라도 위대한 음악가들의 작품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 보고 들을 수 있게 만들었던 공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카라얀이 음반 음악에 대해 평소에 가졌던 생각을 토로한 그의 글입니다.

“아무리 음향효과가 좋은 홀이라 할지라도, 자리마다 그 조건은 달라진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2,000~3,000명 정도 들어가는 홀이라면, 좋은 음향효과를 만끽할 수 있는 자리의 수는 대략 200~300석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경계를 넘어가면 음질은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음반은 음악을 최고의 조건에서 즐길 수 있게 해준다. 음반은 한 명 한 명 모든 청중에게 지휘자가 머릿속에 그린 바로 그 음악을 들려준다.” (앞의 책, 455쪽)

하지만 카라얀의 이런 주장과 달리, 클래식 음악은 콘서트홀에서 라이브로 들어야 제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음반은 여러 번에 걸쳐 녹음을 해서 실수나 튀는 부분을 잘라내고 편집해서 만들기 때문에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라이브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고 음반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클래식 음악에 대해 나름대로의 안목과 주관을 가질 때까지는 시간과 비용, 효과적인 측면에서 라이브보다는 음반이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클래식 음악은 적어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야 어떤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고, 사실 비전공자라면 그 이상 들어도 잘 알 수 없는 것이 클래식 음악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 클래식 음악에 대해 집중적인 청취 훈련을 거쳐서 일정한 수준의 경지에 올라서지 않는 한 잘 알 수 없는 것이 클래식 음악이라고 한다면, 초심자에게는 음반이나 동영상이 라이브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카라얀이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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