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 - 41]

겨울철 농한기를 맞아 우리 마을회관이 문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따로따로 밥을 차려먹던 이웃들이 한 상에 마주 앉아, 함께 밥을 나누는 진정한 의미의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회관 앞 댓돌 위에 신발이 옹기종기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지며 ‘여기가 사람 사는 세상이구나!’ 하고 느낀다. 전기밥솥이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라고만 말해도 사람 소리가 난다며 반가워하고 기뻐하는 시골 어르신들에게 숟가락을 부딪치며 함께 외로움을 달랠 이웃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마을회관 밖에서 바라보는 제3자의 눈이고, 막상 마을회관에서 밥을 먹어 보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이사 와서 몇 번은 멋모르고 마을회관에서 밥을 먹었는데, 분위기가 싸하고 눈칫밥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가지 않게 된다. 특히나 다울이 아빠는 회관에서 밥 먹는 것을 싫어해서 마을 아주머니들이 회관 와서 밥 먹으라고 성화일 때마다 “죄송해요. 애기 아빠가 밖에서는 밥을 잘 못 먹어서요”라며 핑계를 대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새댁이 아무 보탬도 못 되는 것이 미안하기는 하지만 밥은 마음 편하게 먹어야 할 것이 아닌가.

물론 아주 가끔은 회관으로 간다. 어제도 수봉 아주머니가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오셨기에 흔쾌히 “네, 갈게요” 하고 따라나섰다. 마침 다울이 아빠가 볼 일이 있어 먼 데 나간 참이라 혼자 먹기도 뭐하고 해서, 여럿이 같이 먹고 밥값으로 설거지라도 해드리고 와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올해 들어 처음 회관 밥을 얻어먹으러 간 건데,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좁은 부엌에 큰 상 하나 그보다 작은 상 하나가 놓여 있는데, 귀빈석이라고 할 수 있는 큰 상 앞에는 노인회장이신 동티 어르신과 아주머니가 앉아 계시고, 작은 상에 할머니들 대부분이 모여 계셨다. 말하자면 마을에서 힘 깨나 쓰는 사람만이 상석에 앉는 것인데, 나는 다랑이를 안고 있어서 황송하게도 상석에 앉게 되었다. 동티 어르신의 측근인 광덕 아주머니,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세 분 할머니를 돌보러 오시는 요양보호사 아주머니, 이렇게 딱 네 명이 그 큰 상을 차지하고 앉았다. 그보다 작은 상엔 무려 여섯 사람이 앉아 있는데 말이다.

밥 먹을 때도 상석에 앉은 사람들만 이야기를 주고받지, 다른 상에서는 말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어쩌다 이야기를 할 때도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한다. 아흔세 살 되신 우리 마을 최고령 할머니도, 눈이 안 보여 개밥 먹듯이 밥을 드셔야만 하는 복내 할머니도, 쥐 죽은 듯이 마치 이 공간에 없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밥만 드신다.

ⓒ정청라

그러다가 동티 어르신이 가장 먼저 숟가락을 놓고 옆방으로 가시면, 그때부터 조금씩 목소리가 커지고, 상석에만 놓여 있던 반찬도 작은 상으로 옮겨지고는 한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아무 말 못하고 있던 한평 아주머니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국 더 있어? 나도 한 그릇 줘 봐.”
“국 없으면 진작 말하제. 묵고 싶은 거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떠다 먹어. 회관 밥이 자기 밥이지 공짜로 얻어먹는 밥이당가?”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가 큰 그릇에 국을 한가득 떠주시며 말했다. 말씀하시는 게 친딸처럼 다정하고 편안하다. 낯가림이 심한 나로서는 정말이지 부럽고 놀라운 성격! 성격이 까칠하고 새침했던 예전 요양보호사 아주머니와 달리 얼마 전에 새로 온 요양보호사 아주머니는 큰집 맏며느리처럼 수더분했다. 세 분 할머니 살림에 회관 살림까지 도맡아 하시면서도 생색내는 법이 없이 오히려 마을 사람 전체를 살뜰히 챙기실 뿐 아니라, 할 말 못하고 사는 힘없는 할머니들을 대신해서 할 말을 하시기도 했다.

“새대기, 모처럼 조미료 듬뿍 넣은 음식 먹은께 맛나제. 헤헤. 조미료를 안 넣고 해야 건강에는 좋을 텐디 할머니들은 조미료를 넣어야 맛이 난다고 한당께. 애기 젖 먹일라믄 우짜든지 많이 먹소.”

그러면서 내 밥 위에 반찬을 얹어 주시기도 하고, 내가 밥을 편안히 먹을 수 있게 다랑이도 안아주셨다. 덕분에 밥을 두 그릇째 먹고 있는데, 그 사이에 다른 할머니들은 밥을 다 드시고 어느새 밥상을 치우는 손길이 바쁘다.

커피 담당 광덕 아주머니도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해치우시고는 서둘러 커피를 타셨다. 그리고는 “빨랑빨랑 먹어! 먹고 치우게” 하시며 차 한 잔의 여유가 아니라 차를 얼른 먹어 치우게 하셨다. 뜨거워서 못 먹는 할머니에게는 거의 강제로 들이키게 하면서까지 말이다. 그야말로 일사불란한 식사와 마무리! 군대에서 밥을 먹는다면 이런 상황일까?

나 또한 느긋하게 밥을 먹을 형편이 아니라 씹는 둥 마는 둥 밥을 후루룩 마시고 나서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가 애기나 보라고 말렸지만 신참내기가 어찌 애기나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다랑이는 재롱둥이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기고 웃고 빨고…… 그렇게 움직임만으로 마을 이웃들에게 기쁨조가 되었던 것! 평소엔 밥을 먹고 나면 멍하니 앉아서 텔레비전만 들여다보시던 할머니들은 모처럼 눈 둘 데를 찾고 연신 활짝 웃으셨다.

“아이고, 니가 꽃이다, 꽃! 살아있는 꽃이여.”
“애기 하나 있으니까 분위기가 확 사네. 새대기가 자주 오믄 좋겄다.”
“자주는 못 와도 가끔 올게요. 애기 아빠 없을 때…….”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나에겐 회관 분위기가 낯설고 불편한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 역할을 해야 하니까.

올 겨울, 우리 마을 이웃들이 좀 더 따듯하고 살 맛 나는 나날을 보냈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 마을회관이 모두가 주인이 되는 그런 편안한 공간이 되면 좋겠다.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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