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김인국 신부]

안승길 로베르또 신부님이 향년 예순아홉 해를 일기로 떠나셨습니다.
내일 오전 10시 원주 원동성당에서 장례미사가 거행됩니다.

1. 신부님이 누구?

안승길 신부님이 누구시냐고 묻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먼저 이 사진을 보세요.

사진 제공 / 김인국

아시겠어요? 생각나셨나요?
2006년 5월 25일 광화문 시민광장에 계셨던 신부님의 옆모습입니다.
사진 속 신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제게는 평민의 풍모가 그윽하게 느껴집니다.
신부님은 어느 자리에서든 좀처럼 당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분입니다.
사제단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만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창립 이래
한결같은 자세로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현역으로 뛰셨던’ 이력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춰진 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신부님은
사제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계셨으면서도
‘가장자리’를 당신의 자리로 여겼던 분이기 때문입니다.

▲ 2006년 6월 26일, 서울 광화문 시민광장 (사진 제공 / 김인국)

이렇게 말입니다.

물론 맡아줄 일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중심에 서기도 하셨습니다.

▲ 2008년 4월 1일, 낙동강 을숙도공원에서 봉헌한 한반도 대운하 반대를 위한 미사 (사진 제공 / 김인국)

지난 2007년부터 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계셨습니다만,
이런 중요한 자리를 맡고도 당신 입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런 직함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요 며칠 사이 신부님의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거듭 그리고 새삼 깨우치게 된 사실인데
안승길 신부님은 대개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계셨습니다.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다음 사진에서 신부님을 찾아 보세요.

▲ 2007년 3월 27일, 평택 대추리공소 마지막 미사 (사진 제공 / 평화바람)

찾으셨나요?
오른편에 걸려있는 펼침막에서 ‘평택’이라는 글자 아래 가만히 손 모으고 계신 분.
그 분입니다.
그런 자리가 신부님의 자리입니다.

2. 대화를 즐겼던 분

그렇다고 영 말이 없었던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하고나 대화를 즐기던 분입니다.

▲ 2008년 8월 23일, 남아프리카 마리안힐 수도원 (사진 제공 / 김인국)

남아공 더반 인근의 마리안힐 수도원에서 열린 사제서품식에서
그곳 주교님과 환담하시는 장면입니다.
신부님은 제법 영어를 구사하셨지만
그보다 소통의 정신이 아니라면 이런 유쾌한 대화는 어렵겠지요.
신부님은 사제단에 대해 좀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주교님들을 만나더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상황이 되는대로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저는 종종 목격하였습니다.

이제 신부님의 정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진 제공 / 김인국

어느 여행지에서 제가 찍었는데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자리에서
영상으로 겨우 보여드렸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진통제를 여러 대 맞아가며
고통을 참아내던 시간이었는데도
신부님은 빙그레 웃으며 “좋았지!” 하셨습니다.

이런 장면도 있었거든요.

▲ 2008년 8월 23일, 남아프리카 마리안힐 (사진 제공 / 김인국)

사진 제공 / 김인국

제 동생 김인준(마태오) 신부의 사제서품 후
수도원 경내에서 열렸던 축하공연입니다.
미리 챙겨드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만 게으름을 부리고 말았네요.


3. 내 삶의 떳떳함과 즐거움이란

하지만
신부님이 정말 좋았다고 말하던 때는 따로 있었습니다.

“길에서 지내던 나날들, 그때가 나는 사제로서 가장 떳떳하고 행복했어!”

이 한 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무슨 말을 더 나누지도 못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너희들의 강복을 받고 싶다”고 하시기에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해드리며 기도했습니다.
저는 “우리 형님, 그만 아프게 어서 불러가소서” 하였습니다.
우리의 강복을 다 받으신 후에는
차례차례 머리 위에 손을 얹고는 말없이 기도해주셨습니다.

새만금 해창 갯벌에서 서울까지의 삼보일배,
미군기지확장반대 평택 대추리,
지리산에서 판문점까지의 오체투지,
용산참사 남일당,
한반도대운하 반대 국토순례
여의도에서 대한문에서 줄기차게 벌어지던 미사와 천막기도회들…….

신부님은
저 뜨겁고 차갑고 거칠었던 날들이야말로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하던
청춘의 맹서 앞에서 떳떳하고 행복하던 시절이었다며 고마워하였습니다.

신부님이 간직하셨던 푸른 꿈은 어떤 것이었기에 그리 말씀하셨나요?
신부님의 젊음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역사의 한 장면이 여기 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1975년 2월 18일
지학순 주교님이 서울구치소에서 나와
원주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인사를 받던 장면입니다.
주교님 오른편에 시인 김지하
그리고 그 뒤로 빵모자를 쓴 문정현 신부님이 보입니다.
주교님 왼편에서 기쁨을 살짝 감춘 채 서 있는 이가 안승길 신부님입니다.
그 때 안 신부님은 서른하나,
문정현 신부님은 서른다섯이셨으니 퍽 젊었던 때입니다.

정말 떳떳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는
스스로 자신의 젊은 얼굴을 돌아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안승길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길에서 떳떳하고 행복했어!”에는
이 사진이 말하는 정의와 양심에 따라 걸어온 자부심이 들어 있습니다.

아, 신부님은 병실을 나서는 우리에게 이런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금방이야, 금방! 먼저 갈 테니 어서들 오라구!”

우리가 앞으로 걸어야할 길을 생각하면 신발 끈을 느슨하게 풀 수 없지만
신부님처럼 다 달리고 보면
인생은 그야말로 잠시의 두서너 번의 들숨날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신부님은 마치 명랑소년처럼 보였습니다.

성탄 밤미사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다가 신부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흐레 전에 인사를 드리며
다음에는 하늘에서 만나자고 다짐을 두었으므로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만 눈물은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거룩한 분 오시는 성탄을 자신이 떠나는 승천으로 만들다니
신부님에게 딱 맞는 고상한 택일이었습니다.

신부님, 멋지세요.
아무도 잊을 수 없는 당신의 기일에는 언제나 잔치를 벌이겠습니다.
사람들 다 불러놓고 말입니다.


4. 추신

신부들 여럿이 모여서 하룻밤을 보내는 날이면
잠자리를 보살피는 분은 안 신부님이셨습니다.
노인답게 일찍 일어나서는
“그놈들 참 잘 생겼다. 그놈들 참 잘도 잔다”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런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사제단’이라니 허전하고 슬픕니다.
맘 놓고 비빌 편안한 큰 언덕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진짜 신부님의 이야기는 따로 정리해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도 서둘러 신부님이 기다리는 원주로 가야하는데
신부님을 많은 분들이 추억할 수 있도록 몇 자 적었을 따름입니다.

식복사의 도움 없이 혼자 살면서도
먹고 입는 일에서 그렇게 깔끔할 수가 없었던 기품.
옛 도서와 신간을 함께 탐독하던 학습자세.
자주 메모하고, 매일 일기를 쓰는 기록정신.
교회의 미래에 대한 걱정,
사제단의 후배들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애정.
그리고 최후의 통장정리 내역에 대해서는
누군가 따로 말씀드릴 분이 계시리라 믿습니다.

신부님,
그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아래 풍경이란 어떤 것입니까?

철도노동자들이
성탄절을 명동성당 대신 조계사에서 보냈다는 기사 보셨나요?
이젠 그런 걱정도 그만하시고 편히 쉬세요.
그럼 “금방” 뵙겠습니다! 안녕!

성탄절에
안승길 신부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
슬퍼하시는 모든 벗들에게
아기 예수님의 평화를 빌어드립니다.

2013년 12월 26일 스테파노 축일 아침에
 

김인국 신부 (마르코)
청주교구, 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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