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길 신부 장례미사…사제 생활 내내 식복사 없이 가난하게 살아
정의구현사제단 동료 사제들에게 “고맙다, 함께해줘서”

▲ 안승길 신부는 장례미사에는 원주교구 사제들뿐 아니라 생전에 가장 호흡을 잘 맞추어 동행했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140여 명 참석했으며, 신자들이 들어차 성당 안을 가득 메웠다. ⓒ한상봉 기자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지난 24일 밤 선종한 안승길 신부(천주교 원주교구)가 1971년 9월 16일 사제품을 받으며 문장처럼 마음에 새기던 복음 말씀이다.

27일 오전 10시 원주 원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안 신부의 장례미사에는 140여 명이 넘는 사제들이 운집한 가운데, 김지석 주교(원주교구장)의 주례로 봉헌됐다. 김지석 주교는 강론을 통해 “안승길 신부님은 사제로서 흔들림 없이 잘 사셨으니, 하느님의 영광 안에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안승길 신부는 1944년 서울 북아현동에서 태어나 성신소신학교에 다녔으며, 수원교구 소속 신학생이었지만, 1970년 부제가 되기 직전에 원주교구로 적을 옮겼다. 당시 동급생이었던 최기식 신부가 “강원도 가난하고 어려운 곳 광산, 농촌 지역에서 가난한 사제로 살며 가난하고 소외되어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사제 생활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안 신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안승길 신부는 동창생인 이대식 · 최기식 신부와 더불어 1971년 사제품을 받았다.

▲ 평생 절친한 동기생이었던 최기식 신부는, 성탄절을 앞두고 선종한 안 신부를 “사랑하는 친구여, 동료 사제들의 선배여”라고 부르며 떠나보냈다.
고별사에 나선 최기식 신부(원주교구 원로사목자)는 안 신부가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함께하며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번민했으며, 사회의 온갖 부조리, 불평등과 불의 앞에서 사제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고 전했다.

안승길 신부는 ‘가난의 영성’으로 “가난한 성당을 선호했고, 식복사도 두지 않고 사무장도 없이 지내며, 후배들에게 가난의 삶을 권고했다”고 한다. 또한 남몰래 인도와 티베트 사람들을 돕기도 했다. 안 신부는 사제가 되자마자 원주교구 부정부패 규탄대회와 지학순 주교 구속 등을 경험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활동했다. 최기식 신부는 이렇게 전했다.

“안승길 신부는 시대의 징표를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따르는 길, 자기만족에 갇히는 병자가 되지 않고, 가난하여 고통 받고 억압받는 사람들, 그 현장에서 부서지고 깨지는 가운데 그들을 마주하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 십자가 위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그리스도처럼 그런 꿈을 꾸며 세상을 일깨우는 꿈을 실현하려고 열정을 불살랐던 사제였다.”

추모사를 나누는 중에 최기식 신부는 안승길 신부가 선종하기 전에 원주 가톨릭병원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녹음한 마지막 인사말을 들려주었다. 안승길 신부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단되고 나서, 정말 고통 받는 사람들과 소외된 민중들 속에서 함께 지냈던 것이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일이었다”고 전했다. 대추리 투쟁, 용산참사, 삼보일배, 소파개정운동, 강정마을과 밀양에서 “그들의 아픔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덧붙였다. 또한 “사제들은 문정현 신부처럼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아야 한다”면서, 자신이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함께해 준 동료 사제들 덕분”이라고 말했다.

▲ 미사에 참석한 사제들은 안승길 신부의 생전 육성이 들리자, 안승길 신부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애도했다. ⓒ한상봉 기자

 ⓒ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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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학교 시절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수십 권의 일기를 써 왔으며, 매일같이 독서를 하고,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삶을 나누고 증거하는 ‘멋진 사제’였다고 안승길 신부를 소개한 최기식 신부는, 성탄절을 앞두고 선종한 안 신부를 “사랑하는 친구여, 동료 사제들의 선배여”라고 부르며 떠나보냈다.

“삶이란 사랑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짧은 순간이라 했던가. 자네의 70년 평생 삶은 번민과 갈등, 자신과의 싸움, 거리에서 민중 속에서 함께했던 아픔과 고뇌, 헌신과 봉헌, 모두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교회의 한 사제로서 교회의 벽을 넘어 그늘진 곳, 억압 받고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게 하는 눈이 되려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자네의 꿈, 미완성이라 할지 모르나, 완벽한 꿈을 이루는 데 성공이었다네. 삶 전체가 그랬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몰려오는 통증까지 십자가에 붙여 보잘 것 없는 소외된 이웃의 아픔과 하나 되어 봉헌하고, 십자가 제사에 몸을 맡기고 성탄 전날 밤 미사 후 주님 사랑의 품에 들었으니, 떠나는 시간까지 알려주고 모두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선사하며 떠나던 모습, 삶으로 보여주는 구원의 말씀이었다네. 처음과 끝이 하나 된 순간이 되었네.”

한편, 이날 약력보고를 하면서 김민규 신부(원주교구 사목국장)는 “안승길 신부는 사회적 사건을 교회적 시각에서 보고 예언자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으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본당 사제로서 가는 성당마다 직접 페인트통을 들고 다니며 성당을 수리했던 모범적 사제”였으며 “후배 신부들이 성당에 갓 부임하면 불쑥 찾아와 안부를 묻고 홀연히 사라져 ‘안길동’이란 별명도 얻었다”고 전했다. 이어 지난 8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면서 “여러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던 안 신부가 “예수님께서 오시느라 하늘 문이 잠깐 열린 틈에 재빨리 하늘로 올라가시니 부럽다”며 “원주교구 사제로 살아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장례미사를 마친 뒤 안승길 신부는 성지 배론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삼우미사는 29일 오후 2시에 성지배론 성당에서 봉헌한다.

▲ 김지석 주교가 분향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 이날 최기식 신부의 고별사에 이어, 원주교구 평협 강호석 회장의 추도사에 이어 헌화가 있었다. ⓒ한상봉 기자

▲ 미사를 마치고 원동성당에서 배론성지로 향한 준비를 마친 운구차량 ⓒ한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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