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27]

“자신을 위해서만 부를 소유하는 이는 죄를 짓는 것이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빚을 갚는 것과 같다.”(간추린 사회교리 329항)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돌볼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우리는 자비의 행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46항; 간추린 사회교리 184항)

“애덕의 실천은 자선 행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빈곤 문제의 사회적
정치적 차원들에 대처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84항)

여러분은 동의하시는지요?

‘무한 경쟁’의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세상살이가 당연이며 필연이라고, 더 나아가 절대적인 것이라 믿는 분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느냐를 놓고 모든 것을 평가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마치 ‘소유’야말로 인생의 의미이며, 세상살이의 목표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 현상을 설명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학문 하는 것도, 사회를 구성하는 것도, 인간관계를 맺는 것도, 노동하는 것도, 가정생활을 꾸려가는 것도, 하다못해 신앙생활도 ‘재물의 소유 정도’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진다.

그렇게 ‘소유’만이 전부라고 믿는 세상에서는, 나눔이라든가, 남을 돌본다든가, 정의의 의무를 실천한다든가,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든가, 하는 일들은 부질없는 짓처럼 보일 뿐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 그리스도인마저 그렇게 믿고 실제로 그 같은 태도로 살고 있다면, 더 나아가 그리스도 교회마저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성찰해야 한다.

앞에 소개한 내용들은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의 공식 교리서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의 고백과 가르침과 다른 길을 가는데, 어떻게 ‘가톨릭 신앙’이라 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우리 그리스도교가 신앙과 교리의 근거로 삼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과 해방’이다.

 ⓒ한상봉 기자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혹독한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신음하는 소리를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을 해방(탈출)시키셨음을 기본 축으로 46권이 편성되어 있다. 신약성경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역사적 체험을 27권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가톨릭 신앙은 그 본성상 ‘소유’만을 전부라고 믿는 세상과 양립할 수 없다.

어느 시대에나 노예생활이든 어둠과 죽음의 굴레이든, 비구원과 억압의 상태는 있기 마련이다. 이를 교회는 ‘가난’이라 하고, 이 가난을 가져오는 것을 ‘불의’라고 한다. 그렇게 ‘불의’와 ‘가난’이 일상이 되고 있는데 어떻게 거룩한(?)곳에 모여 하늘을 향해 빈말의 기도와 공허한 몸짓의 예식 거행만을 교회가 해야 할 일 전부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는 스스로 하느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이기를 부정하는 ‘자기부정’에 다름 아니다.

가톨릭 신앙의 길은 끊임없는 해방과 탈출의 몸짓으로 땀과 피를 흘리는 고난의 여정이어야 한다. 광야와 메마른 땅에서 맥 풀린 손과 꺾인 무릎으로라도 기어서라도 가야 할 길이 바로 우리 가톨릭신앙의 길이다. 눈과 귀가 멀고 말을 못하고 다리를 절더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길이 바로 가톨릭 신앙의 길이다. 바로 그 신앙의 길이 하느님의 구원과 주님의 해방을 향한 길이기 때문이다.(대림 제3주일 1독서와 복음)

믿기만 하면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 하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1독서)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의 “왕궁”(복음)을 보장해 준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과 교회의 고백과 가르침은 귀에 거슬리고 심기를 불편할 것이다. 오늘 2독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예언자들을 고난과 끈기의 본보기로 삼으라” 하기 때문이다”(2독서). 고난과 끈기는 누구나 건너뛰고 싶은 장애물이지만,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이를 오히려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대림시기, 주님을 기다린다는 우리 교회와 신앙인의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이, 이 땅의 가톨릭교회가 고난의 길을 피하고 외면한 채, 끝없는 즐거움을 탐하고,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의 왕궁을 세우는데 힘을 쏟는다면, 겉으로는 신앙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불신앙이며, 겉으로는 하느님의 교회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부와 권력을 탐하는 집단을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오늘을 특별히 자선주일로 기념하고 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진심으로 기다린다면, 그리고 구원과 해방을 갈망한다면, 끈기를 갖고 정의의 의무와 자선, 빈곤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대처와 애덕을 실천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한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라’고 다그치는 우리 사회에서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역류의 길이다.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어 갖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것을 훔치는 것이며,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것이다. 먼저 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정의에 따라 이미 주었어야 할 것을 마치 사랑의 선물처럼 베풀어서는 안 된다.”(간추린 사회교리, 2446항)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활동을 완수하셨듯이, 그렇게 교회도 똑같은
길을 걸어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교회는 그
사명을 수행하려면...현세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범으로도 비움과 버림을 널리 전하도록 세워진 것이다.”(교회헌장 8항)

“힘을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대림 제3주일 영성체송).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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