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13]

요즘은 자신이 원하는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 음악 감상실을 찾거나, LP판이나 CD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건 원하는 곡을 들을 수 있고, 심지어 연주 실황을 녹화한 동영상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키고, 음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선택의 폭을 넓게 만든 것은 IT와 미디어 산업의 발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 예로 베르디의 <레퀴엠>을 듣고 싶다고 하면, PC나 태블릿PC, 스마트폰 등으로 인터넷에 접속한 다음, 유튜브 사이트 검색창에서 ‘Verdi requiem’이라고 치면, 레퀴엠 연주 실황을 녹화한 동영상이나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음반의 목록을 화면상에서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 목록 중에서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클릭하거나 터치하면, 그 즉시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지요.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러한 세상이 올 것을 예상했던 사람은, 모르긴 몰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음악 애호가들은 좋은 오디오 구입이나 희귀한 음반 수집에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을 테지요.

수십 년 전에는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학교 음악 감상실이나 클래식 카페를 찾아가서, 쪽지에다가 신청곡을 적어내고 수십 분 내지 그 이상 기다리다 보면, 운이 좋은 날은 자신의 신청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자신의 신청곡을 듣고 못 듣고는 디스크자키(DJ)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각기 다른 곡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면, 디스크자키의 입장에서 원하는 곡을 모두 들려줄 수 없었을 테지요. 그러다 보니 시간을 들여서 음악 감상실을 찾았어도, 듣고 싶은 곡을 듣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든 자신이 듣고 싶은 곡을 언제 어디서든지 간편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도중이건, 집 안 어디서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거나, 동호회를 통해 체계적으로 음악 감상법을 익히고, 관련 서적을 즐겨 보는 일반인들의 음악 수준도 이전과 달리 많이 달라졌을 법합니다.

누구든 세계 최고 수준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동영상을 언제든 보고 들을 수 있고, 실제로 연주회장에 가서 라이브로 연주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은 연주자나 청중 모두의 입장에서 좋은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음악을 전공했든 하지 않았든 연주회장을 찾는 사람들이 이전과 달리 연주곡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을 테니, 전공자로서도 더 분발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셈이고, 더 나아가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음악 감상실이나 연주회장을 굳이 찾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듣고 싶은 음악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에 관한 책이나 연주회를 소개한 브로슈어를 읽다가, 생소한 음악 용어라도 나오면 인터넷 지식 검색을 통해 그 즉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으니, 참 편리한 세상이라고 해야겠지요.

음악을 듣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음악을 들을 때 감동을 받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음악을 들을 때 사람들은 곡의 흐름이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상하고 그 예상대로 곡이 흘러가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곡의 흐름이 바뀌고 예상이 빗나가면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곡의 흐름에 집중하게 되면서 긴장하는데,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곡의 변화가 이어지면서 감정을 고양시킬 때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음악과 과학의 만남>, 로베르 주르뎅 지음, 최재천 · 채현경 옮김, 궁리, 2002
로베르 주르뎅이 쓴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라는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음악이 주는 감동은 기대가 어긋나면서 생긴다. 불협화음, 당김음, 선율 흐름의 변화, 갑자기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소리의 크기에서 감동이 생긴다. 연주가들은 짧은 시간이나마 박자의 빠르기나 연주 소리의 크기에 변화를 주어, 연주하는 곡에 자신의 느낌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작곡가들은 자신이 만들어가던 흐름을 뒤집으며, 그 곡을 들을 사람들이 받을 감동의 수위를 높인다. 하지만 너무 많은 변화를 주면 듣는 사람이 기본적인 박자 감각을 놓치게 되고, 더 이상 그 곡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반음계를 너무 많이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음악을 만드는 것이나 연주하는 것 모두 음악의 기본적인 구조를 유지해야 하는 것과 변화를 가미해야 하는 것 사이의 끝없는 줄다리기와 같다.”

이처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잘 이해할 수 있는 곡보다, 큰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곡이 더 감동을 줄 수 있는 곡이라고 하지만, 기본적인 박자 감각을 놓칠 정도로 많은 변화를 주는 것은 피해야 한다는 주르뎅의 논리에 따르면, 균형과 조화, 자유, 그러면서도 예측가능성을 추구했던 고전주의, 낭만주의 음악과, 불협화음이나 반음계, 12음계를 사용해서 난해하게 만든 현대 음악 사이에서, 듣는 사람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현대 음악은 대부분 대학에서만 행해지며, 사실상 아무도 듣지 않는다. 화음, 선율, 리듬을 해체해서 거의 뭐가 뭔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든 이런 음악은 순전히 지적 활동에 불과하다”는 레비틴의 탄식이 음악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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