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16]

음악가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작곡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가난과 싸워야 했던 불우한 음악가들이 있었는가 하면, 궁정과 교회의 음악 책임자라는 안정된 자리에 있으면서 여유 있는 삶을 누렸지만 작품다운 작품을 남기지 못했던 음악가들도 있었습니다.

바흐는 스무 명(그 중 반만 생존)이나 되는 자녀들을 키우느라 그랬던 것인지 모르나, 어렵게 얻은 교회 칸토르(음악감독) 직분을 수행하느라 쉴 새 없이 작곡과 교회 합창단 지휘, 음악 지도를 해야 했습니다. 1,126곡에 달하는 방대하고도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고,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곡들은 자주 연주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은 기억하지도 못하는 당시 음악가들의 명성에 밀려 교회 칸토르 자리도 얻지 못할 뻔했으며, 까다로운 계약 조건과 적은 봉급 때문에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이것저것 부업을 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걸작을 남겼던 모차르트도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대주교와 결별한 이후 작곡에 매진하면서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지만, 빈곤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빈의 귀족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만족하면서도 경제적인 도움에는 인색했습니다. 그래서 생활을 위해 작곡과 연주에 몸을 혹사하는 가운데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30대 중반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0년 후 모차르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푸슈킨은 모차르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란 희곡을 쓰기도 했지요.

또한 1,000곡에 가까운 주옥같은 작품을 썼고, 가곡을 음악의 독자적인 한 부문으로까지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슈베르트도 생전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극심한 가난 속에 시달리다가 서른한 살의 나이에 질병과 굶주림으로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반면에 작곡과 연주 등 음악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지만 귀족이나 교회와의 유대관계에 있어서 능력이 뛰어난 음악가들은 안정된 직책을 맡아 궁정음악가나 교회의 음악감독으로서의 명예를 누리며 경제적인 안정 속에 생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시의 음악가들은 오늘날과 달리 음악가로서의 독자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던 데다가, 교회나 귀족의 재정적인 지원에 늘 의존해야 했던 탓에, 그들과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바흐나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은 곡을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았지,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서툴렀던 탓에, 그토록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 이후의 음악가들인 로시니나 베르디, 파가니니, 리스트, 조지 거슈윈과 같은 경우는 다른 음악가들과 달리, 음악으로 부와 명성 모두들 얻을 수 있었던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로시니는 오페라를 작곡하기로 극장 측과 계약을 한 후 13일 만에 완성한 <세비야의 이발사>로 이탈리아는 물론 전 유럽에까지 명성을 떨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큰 부를 얻을 수 있었기에, 서른일곱 살 이후로는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고도 40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베르디 또한 음악으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었고, 파가니니와 리스트는 연주회 때마다 엄청난 출연료를 받았으며, 조지 거슈윈의 1년 수입은 당시 돈으로 10만 내지 20만 달러였습니다.

이들은 작곡가이면서 때로 연주나 지휘를 통해 큰돈을 벌어들이는 부자 음악가들이었지만, 오늘날 작곡가들의 경제 형편은 이들과 같지 않다고 크로이치거헤르는 그의 책 <퀼른 음대 교수들이 엄선한 클래식 음악에 관한 101가지 질문>에서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작곡가는 그리 많은 돈을 벌지 못합니다. 작품의 거의 90퍼센트 정도가 초연에 그치고, 더 이상 음악회의 레퍼토리로 자리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작곡 활동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언젠가 브람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음악가와는 늘 돈 이야기만 하려 드니, 난 차라리 은행가와 음악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소.’”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한 친구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사회 정의나 공평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사회적 지위와 부를 당연히 차지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공평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것만 해도 억울한데, 능력 있는 사람 밑에서 평생 기를 펴지 못하고 지내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는 의도로 그러한 말을 했을지 모르나, 그가 그러한 말을 꺼냈던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로시니만 하더라도 스물네 살 때 쓴 <세비야의 이발사>가 큰 성공을 거두자, 30대부터 작품 활동을 하지 않고도 평생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었으니, 이는 음악적 재능이 뒤떨어지는 음악가들의 시각에서 보면 공평치 못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러했기 때문에, 로시니가 30대 이전에 썼던 많은 작품들이 베르디와 사실주의 오페라가 등장하면서 잊혔다가, 100년 가까이 지난 다음 벨칸토 오페라의 부흥기에야 오페라하우스의 레퍼토리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일반인들에게는 사실상 그의 대표작인 <세비야의 이발사>의 작곡가로만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 비추어볼 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에 바흐나 모차르트, 슈베르트를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은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쉴 새 없이 작곡과 다른 음악 활동들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가난이 수많은 걸작들을 후세 사람들에게 남겨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모차르트나 슈베르트도 베르디나 리스트처럼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