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세상이 흐리고 희망하기가 힘들다고 기운 빠질 때 즈음이면 대림이 온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전례는 고단한 인간의 생을 정말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톨릭 신자라면, 한번쯤은 어느 해인가 아주 힘들게 일하고 지친 마음으로 성당에 갔을 때, 보라색 대림초에 불이 켜지고, 대림환의 초록 잎에서 흘러나오는 신선한 생명의 냄새를 우연찮게 만났을 때의 그 울렁거리는 마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나는 대림이 오면, 꼭 토요일 저녁 미사에 간다. 대림이라는 은총의 시간을 온 맘으로 끌어안고 싶고, 내 나름대로 마음껏 환영하고 싶어서이다. 대림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그리고 온 세상에 임하시길 기다리는 시기인데, 영어로 하면 애드벤트(Advent)이며, 이 말은 라틴어로 앗벤투스(Adventus), 즉 ‘오심’이란 뜻이다.

누군가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면 기쁨과 설렘이 주를 이루는데, 여기에는 물론 애타는 조바심도 포함된다. 좋아하는 두 사람 사이에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기다리고, 많이 조바심을 갖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고운 마음이고 다치기 쉬운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림을 사는 우리의 마음은 조심스럽고, 또 부드러운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다시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훨씬 크셔서, 그분의 마음은 더욱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야 하지 않았을까?

언젠가 선배 수녀님이 들려주신 묵상이 떠오른다. 아주 추운 저녁에 아기 예수님을 묵상하다가, 그분의 십자가를 보았다고. 아기 예수님이 추우시겠다고 걱정하면서 바라보던 구유에는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계시더라고 했다. 그때 그 말씀을 하시는 수녀님이 한없이 맑고 깊어 보였다.

사실 대림 안에 수난이, 성탄 안에 부활이 담기는 것이 신앙의 신비이며, 그것을 꿰뚫어 보는 신앙이 세상을 사는 힘일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대림을 산다는 것은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그분의 성탄을 기다리면서, 세상의 한복판에 놓인 그분의 수난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의 오심, 이 세상에 언젠가 구현될 완전한 하느님 나라의 그림자를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대림은 감상적일 수만은 없다. 보랏빛 종소리에 마음을 밝히고 대림초에 불을 붙일 때, 우리는 거리로 나아가야 한다.

사랑은 눈 내리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장난처럼 가볍고 즐겁게 조금씩 내리지만, 그 눈이 쌓이면 생나무를 찢어 내리는 거대한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대림의 아름다움과 그 설렘은 사랑의 아픔으로 나아가라는 초대인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전에도 오셨고, 지금도 오시며, 앞으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림도 결국 이 시간, 여기, 내게 다가오는 하늘 나라로 성큼 걸어 들어가 그분을 만나라는 초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대림에 “너희는 광야에 나가 무엇을 보았느냐”는 세례자 요한의 얼음장 같은 말씀을 듣는다. 거리로 나가서 나는 무엇이, 혹은 누가 내가 오는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니, 거리로 나가서 나는 무엇을, 혹은 누구를 보고 싶은지 먼저 묵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박정은

얼마 전 교회의 노사제(老司祭)가 진실을 이야기해 주셨다는 보도는 나에게 참 은혜로웠다. 바른 이야기를 힘 있게 하시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음에 목 안이 얼얼할 만큼 고마웠다. 거리로 나가서 그런 분의 말씀을 깊이 경청하고 싶다. 진실을 헤아리는데 무디어진 나의 감각을 다시 좀 예리하게 하고 싶다. 유신시대의 살벌함은 아닌데, 분명 아닌데, 더 힘들고, 더 아픈 이 시대의 죄스러움을 더 알고 배우기 위해 거리로 나가고 싶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 청년들을 만나고 싶다. 아니, 추억 속의 그 청년들, 눈물 글썽이며 “우리는 주의 발자취를 이웃에서 보네”를 목 놓아 부르던, 이제는 중년이 되어 있을 그 가톨릭 청년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때 가톨릭 신앙이 우리의 자존심이며 자긍심이었음을 다시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개를, 그 푸르렀던 신념을 되돌리고 싶다.

나는 영성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영성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영성이 우리의 경험에 관한 해석이요, 그 의미 찾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험이 우리가 놓인 사회 안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회의 아픔과 분노, 정의에 관한 갈망이 우리의 경험 한가운데 놓임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와 친한 동료는 한층 더 나아가 영성은 정치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 나라와 그 힘의 분배에 있기에 그러하다. 그는 독일의 루터교 목사에서 가톨릭 수녀가 되기까지 많은 영적 여정을 거쳤는데, 우리가 함께 발표하는 연구에서도 내가 사회적 영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는 거기에 정치적이란 주장을 더한다.

영성은 수묵화처럼 관조하면서, 아름답고 따스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 정치적인 정황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면서, 아름답고 따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 전체다. 그러기에 나는 우리 민족이 겪는 이 아픔 속으로 다가가 배우고 싶다. 한 인격을 미워하지 않고, 내 인격을 다치는 일 없이, 여전히 희망하며 견디는 일, 그 고단한 작업을 해보고 싶다.

자본주의에 영혼을 판 우리 세대는, 대림이 주는 아주 부드러운 은총 앞에, 가난한 마음이 가지는 행복을 다시 한 번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는 “내가 갖고 싶은 집은 작은 초가집, 내가 갖고 싶은 책은 하얀 성경 책, 욕심 없는 나의 마음 탓하지 마라, 사람들아” 하는 노래다.

좋은 것, 비싼 것이 줄 수 없는 삶의 품위는 물질을 소유함보다는 물질에서 자유로움에서 온다고 본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힘으로 풍족하게 살 줄도 알고 가난하게 살 줄도 안다(필리 4,12)고 고백하고 싶다. 요즘 세상을 보면, 톨스토이의 소설처럼 인간은 얼마만큼의 땅을 가져야 행복할 수 있나 늘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맑은 가난을 사는 그리스도 형제, 자매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갑부들의 식탁보다 훨씬 고상하게 시장에서 국수를 먹는, 그런 형제, 자매들과 사는 이야기를 하며 수다를 떨고 싶다.

지난주에는 미국종교학회가 볼티모어에서 열렸다. 이번에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모임은 교황 프란시스코에 관한 토론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패널 토의자로 나선 조앤 치스터 수녀가 “교회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의 주류가 여성임에도 여성에게 단지 ‘모성성’을 강요하며, 여전히 우리가 하는 신학은 세계 가난한 사람의 3분의 2인 여성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쐐기를 박자, 모두들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의 단순하고 깊은 진실에 대해 공감하면서 말이다.

오늘 대림의 첫 아침, 잘 보이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에 관한 따스한 시선과, 우리를 무뎌지게 하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바라보는 차가운 이성을 하느님께 청하며, 그러나 분명히 오실, 혹은 오시는 하늘 나라를 희망하며, 그렇게 대림의 신비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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