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3]

다시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중국과 북한을 다녀왔다. 처음 외국에 나갔던 30년 전과 달리 이제는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것이 설레지도 긴장되지도 않는다. 그래도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사회를 찾아가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알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것은 소중한 체험이다. 익숙하지 않은 곳을 찾아갈 때 스스로의 가난을 체험하고 겸손을 배운다. 그것은 또한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만나는 모험이 될 수도 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나라였다.” 10대 때 읽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설국(雪國)>의 첫 문장은 아직도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지금은 내용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 소설의 한 구절이 왜 그렇게 뇌리에 분명히 새겨졌을까?

아주 어릴 때부터 먼 나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자랐다. 초 · 중 · 고등학교를 다닌1970년대에는,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도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갈 수가 없었다. 일본과는 바다뿐 아니라 깊은 역사적, 정서적 거리감이 우리를 떼어 놓고 있었다. 한반도에 살면서 섬처럼 고립되었다고 느꼈다. 당시의 암울한 정치 상황 탓도 없지 않겠다. 닫히고 막힌 곳을 빠져나와 사방이 활짝 열린 세계를 보고 싶은 깊은 열망이 내 안에 있었던 것 같다.

20대 중반에 처음 유럽에 와서 기차를 타고 여러 나라의 국경을 지나가 보았다. 안내 방송이 불어, 독어, 영어, 화란어로 연이어 나오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 기차역 하나 지나가듯 자연스러운 모습이 부러웠다. 이런 느낌은 한동안 기차 여행 때마다 계속되었다.

▲ 지난 10월, 북한을 방문한 떼제 공동체 신한열 수사와 알로이스 원장 수사가 평양 장충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신한열)

1980년대 말 독일이 통일되기 전에 동베를린에 갈 때의 스릴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서베를린에 가 있는 동안 독일 친구와 함께 동베를린을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매주 기도 모임을 하는 친구들을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남한 사람이 ‘적성국가’인 동독에 가는 것이 위험시되던 시절이었다.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동베를린 방문이 가능한지 문의했더니 신고하고 허가를 받으면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더니 한국 정부에 연락해서 허가받는 데 한 달이란다. 고작 일주일 남짓 서베를린에 있던 터라 포기했다. 그런데 독일 진보신문의 기자 한 사람이 그냥 다녀오라고 나를 부추겼다. 그렇게 가보는 한국 사람 꽤 있다면서.

서베를린에서 지하철을 타고 얼마 가지 않아 프리드리히 쉬트라세(Friedrichstrasse) 역에 도착하면 그곳이 국경이었다. “코리아 사람이라고요? 북한 아니면 남한?” 입국심사대의 뚱뚱한 중년 남자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남한 사람이라는 대답을 듣자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윗사람과 상의하는 것 같았다.

긴장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결국 허락되었다. 여권에는 아무 표시도 없이 별도의 입국허가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날 저녁 동베를린을 떠날 때는 그 종이를 도로 회수해 갔다. 그렇게 해서 내 여권에 ‘적성국가’ 방문 흔적이 남지 않고 동독을 다녀오게 되었다.

서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는 통쾌했다. 또 하나의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베를린에 장벽이 쌓인 지 25년 남짓 되었을 때였다. 우리가 방문한 동독 친구들은 서독이나 다른 서방국가로 여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에 떼제의 수사들은 동유럽 여러 나라로 소리 없이 찾아가거나 젊은이들을 보내서 신자들을 만나고 함께 기도했다.

얼마나 많은 장벽이 서로를 만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고 굳어지는지 모른다. 만나지 않기에 서로를 모르고, 다른 사람을 모르기에 두려워하고 경계심을 가진다. 나(우리)와 남을 가르는 수많은 경계도 마찬가지다. 한번 넘어보면 별 것 아닌데, 첫 한 걸음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경계를 넘지 못하거나,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편견과 두려움의 장벽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가?

외적의 침범을 자주 받았던 역사 때문일까? 혹은 해방 이후 좌우의 대립와 6.25 전쟁의 상처 탓일까? 우리 사회에는 중간과 중립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편 가르기가 심하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계선을 긋고 살아가는가. 경계(境界)를 의식할수록 남(다름)을 경계(警戒)하게 된다.

사람 사이, 지역 사이, 나라 사이, 종교 사이의 경계를 조금씩 넘을 때마다 우리는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남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눈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우선 내 마음 안에 있는 경계선을, 의심과 두려움의 장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번 북한 방문 때 마지막 일정은 개성과 판문점이었다. 개성에서 서울까지는 70킬로미터, 평양까지는 160킬로미터, 고속도로 이정표에 선명히 나와 있었다. 그런데 서울로 오기 위해서 평양으로 가서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거쳐 와야 했다. 아직도 굳건히 서 있는 이 분단의 장벽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더 열렬한 마음으로 시편을 노래한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면 어떤 담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고 나의 하느님께서 힘이 되어주시면 못 넘을 담이 없사옵니다.” (시편 18,29)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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