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13]

우리 공동체와 가까왔던 두 분의 할머니가 부활 주간에 영원의 세계로 떠났다. 한 분은 십남매를 낳아 기른 체코의 여성이고, 다른 한 분은 떼제 근처 클루니에서 평생 독신으로 사신 프랑스인이다. 두 분 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졌다.

우리가 “마담 카플란”이라 부르던 마리아 카플라노바(1928~2014)는 가톨릭 작가의 딸로 태어나 영어와 불어를 가르쳤고 외신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리스도인 활동가로서 벨벳 혁명 직후인 1990년대 초에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2년 동안 일했다. 정보공학자인 남편 이리와 십남매를 낳아 길렀다.

친소련 공산당 치하에서 이리는 떼제의 책과 글을 체코 말로 번역했다. 마리아와 이리는 떼제의 형제들과 떼제가 보낸 젊은이들을 맞아 은밀히 기도 모임을 마련하곤 했다. 프라하의 카플란 가정은 교회가 박해받을 때 수많은 신자들이 모여 기도와 나눔으로 힘을 얻어가는 장소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복음의 열정으로 사신 분이었다. 경찰 여섯 명이 집에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할 때도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얘기한 것은 우리에게 전설처럼 남아 있다. 경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약속한 날이면 용케도 청년들이 모여와 함께 기도했다. 결국 남편 이리가 잡혀가 재판을 받을 때, 마리아는 남편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법정에서 노래를 불렀다. “두려워 말라. 기뻐하라! 그리스도 부활하셨다!” 떼제의 모임을 위해 체코 말 가사에 곡을 붙여 만들었던 노래였다.

▲ 10년 전 마리아와 이리 카플란 부부와 함께한 필자 (사진 제공 / 신한열)

사람들이 “마드무아젤 르비야”로 불렀던 마리 안젤리 르비야(1922~2014)는 떼제의 옆 마을 마시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세상의 비참을 목도한 그는 열여덟 살 때 “불우한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서약했다. 간호사가 된 마리 안젤리는 1943년에 클루니에 정착했고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부상당한 이들을 보살폈다. 1944년 8월 클루니가 독일군의 폭격을 받았을 때도 남았던 유일한 간호사였던 그는 마지막 부상병이 떠날 때까지 헌신적으로 간호했다.

마리 안젤리는 전후에 사회복지사가 되어 클루니와 주변의 노인들과 불우한 가정을 돕는 안전망을 만들었다. 유아원과 사회센터를 곳곳에 세웠고 가난한 집 자녀들을 위한 여름 캠프를 조직했다. 90세가 넘을 때까지 수십 년 동안 지역사회의 수많은 프로젝트와 NGO에 관여했다. 하지만 자신은 “(시대와 사회의) 필요에 응답하려고 노력했을 뿐, 혼자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 평생 마드무아젤(* 미혼 여성에 대한 경칭)이었지만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마드무아젤 르비야는 70년 동안 우리 떼제 공동체의 역사를 옆에서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했다.

마담 카플란과 마드무아젤 르비야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려운 시대와 지역에서 살았다. 두 분 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지만 교파와 종교, 이념을 넘어서 모든 이에게 다가갔다. 참혹한 세계대전을 겪었고 무신론과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하지만 그분들은 시련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품 있게 자신의 방식으로 복음을 증거했다.

동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 유별나게 교회 탄압이 심했던 체코는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지만 유럽에서 가장 신자가 적은 지역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에 체코 교회 당국은 옛 재산을 되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그 과정에서 비신자들과 일반 국민들의 마음과 신뢰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중세 서유럽 정신문명의 중심이었던 클루니 수도원은 한 때 유럽 각지에 1천2백 개의 수도원과 2만 명에 이르는 수도승을 거느렸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쇠퇴하고 프랑스 혁명 때 완전히 파괴되었다. 19세기에 수도생활을 복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클루니와 주변 지역에는 반성직주의와 반교회적인 사상이 만연했다.

역사적 · 정치적 · 사회 문화적인 이유로 교회의 ‘선포’나 ‘가르침’이 통하지 않고 수용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증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상처 입은 시대, 고통 받는 사람들을 어머니 같이 넓은 품으로 감싸주고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줄 때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난다. 그런 삶은 복음의 한 페이지와 같다.

프랑스와 체코에서 두 분이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나자, 우리 형제들은 “교회의 어머니” 같은 분들이 떠났다고 아쉬워했다. 사도 시대 이후 몇 세기 동안 정통 신앙을 정립해 가르쳤고 덕성이 뛰어난 분들을 우리는 ‘교부들’(영어로 Church fathers), 곧 ‘교회의 아버지’라 부르며 공경한다. 비록 ‘교회의 어머니들’(Church mothers)이란 용어가 없다 해도, 그 역할을 하신 분들은 끊임없이 있었으리라. 교회의 아버지들만큼 주목 받지 않아도, 수많은 교회의 어머니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신앙의 유산이 전달되지 않았을까.

성모 마리아 없는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모니카 없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생각할 수 있을까? 교회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거룩한 과부들과 동정녀들이 있었던가?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중세의 타락과 혼돈 시기에 교회와 국가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마찬가지로 빙엔의 힐데가르트가 끼친 영향은 영적인 분야에 한정되지 않았다. 일부 남자 성인들에게만 주어지던 ‘교회 박사’라는 칭호가 1970년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2012년에는 빙엔의 힐데가르트에게도 부여되었다. 어쩌면 ‘교회 박사’보다 ‘교회 어머니’가 더 나을 듯도 싶다.

▲ 마리 안젤리 르비야(왼쪽에서 두 번째). 2009년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때의 모습이다. (사진 제공 / Ville de Cluny)

〔사실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역사적으로는 밀라노의 암브로시오가 그렇게 불렀지만, 1944년 예수회원 후고 라너가 그 사료를 재발견할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초대 교회에서 마리아가 했던 역할을 강조한 초세기 교부들과 암브로시오에 의존한 그의 마리아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 동안 교황 바오로 6세가 성모 마리아를 공식적으로 “교회의 어머니”라 불렀고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에 담기게 되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선포하기 전에도 성모님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이미 교회의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딸과 그 딸의 딸들이 어머니가 되는 법, 성모님 한 분이 어머니 칭호를 굳이 독점하려 하실 것 같지도 않다.〕

좀 더 가까이 보면 19세기에는 잔 주강과 같은 분이 있었고, 20세기에는 가톨릭일꾼운동 창립자 도로시 데이도 있었다. 대학생 시절에 서울과 캘커타에서 만났던 마더 데레사의 손은 농촌이나 시장터에서 일하는 어머니, 할머니의 그것과 같았다. 내 손을 잡아주시던 그분의 묵직하고 거친 손 마디는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한국 교회에는 우선 순교자 강완숙 골룸바가 떠오른다. 그로부터 백여 년 뒤에 간호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평생 빈민과 환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하다 영양실조로 숨진 서서평(Elisabeth J. Shepping) 선교사, 대구 근처의 나환자들을 위해 온 삶을 바친 오스트리아 여성 엠마 프라이징거(Emma Freisinger)도 있다. 어떤 가난한 나환자는 맨손으로 상처의 고름을 짜주던 그를 “엠마, 엠마…… 엄마!”라고 불렀다. 장로교 신학대학의 주선애 교수도 떠오른다. 자신의 아이는 하나도 낳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엄마가 된 여성이 어디 한둘이랴.

어머니들은 자애롭고 인자한 모습만이 아니라 강한 생명력과 담대함, 불굴의 인내와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생명과 사랑으로 신앙을 증거하고 전해온 이름 모를 “교회의 어머니”들은 또 얼마나 될까? 수많은 여성들이 교회를 지탱해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5월, 성모의 달이다. 하늘 나라에 계신 내 어머니와 이제 할머니가 되신 몇몇 수녀님들, 엠마 원장과 주선애 교수님을 생각한다. 또 프라하의 마리아와 클루니의 마리 안젤리를 기억하면서 교회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보내고 싶다.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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