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의 음악과 나 - 8]

▲ <파가니니의 초상>, 들라크루아(1832년)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특징과 연주 기교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곡이 있다면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가 쓴 <바이올린을 위한 24개의 카프리치오>와 같은 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파가니니 당시의 바이올리니스트 중에는 이 곡의 악보를 보고서 “이 곡은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이가 있었을 정도로, 연주자에게 이 곡은 특출한 기교를 요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에 있어서 탁월한 천재였으면서도, 살아서는 갖가지 악의에 찬 소문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았고, 죽고 나서도 악의적인 소문 때문에 고향에 묻히지 못하다가, 36년이 흐른 뒤에야 고향의 교회 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는 파가니니.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카프리오소>를 듣다 보면, 바이올린이란 악기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곡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파가니니 생존 당시 사람들은 그의 소문을 듣고 그의 연주를 듣기 위해 그가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 파가니니(Paganini)란 이름의 뜻이 ‘작은 이교도’인 것도 그렇지만, 기이한 용모에, 연주 모습 또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보니, 그의 연주를 본 사람들은 그가 ‘초자연적인 자질을 가진 연주자’, 심지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메피스토’라는 소문을 퍼뜨리곤 했습니다.

이러한 파가니니에 얽힌 일화를 접할 때마다 아쉬운 생각이 들곤 했던 것은 당시의 비평가나 사제, 청중들이 파가니니와 그의 음악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모두 ‘내 탓입니다’라고 생각하고서 그와 그의 음악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더라면, 바이올린이 보여줄 수 있는 음악 세계가 더 다양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하튼 파가니니는 유럽 대륙 어디를 가나 사람들에게 경탄과 경악을 자아낸 컬트(종교적인 숭배 대상)의 대명사였습니다. 독일 시인 하이네마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라이브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플로렌스 야화>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함부르크 시내를 산책하던 파가니니는 대낮의 환한 태양 아래에서 무척 호감이 가는 씩씩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저녁에 극장에서 본 그의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모습에 나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한참을 기다린 끝에 무대 위에 검은 형체가 나타났는데, 검은 연회복 차림의 파가니니는 마치 지옥에서 막 올라온 듯한 모습이었다. 검은 연미복에 악마가 디자인한 것 같은 검은 조끼, 가느다란 다리 위로 펄렁거리는 헐렁한 검은 바지를 입은 그는 깊이 허리를 숙여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인사를 했다. 안 그래도 긴 팔에 들린 바이올린과 활이 땅에 닿을 듯했다. 관객들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출몰할 때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파가니니의 인사가 끝났다. 그리고 이 기이한 거장이 그의 바이올린을 턱에 대고 연주를 시작하자, 모든 생각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파가니니는 작곡도 작곡이지만, 고난도의 다양한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바이올린 하나로 내지 못하는 소리가 없을 정도로, 바이올린을 잘 다루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대식가이자 미식가였으며, 독일의 철학자들이 칭송해마지 않았던 <세비야의 이발사>를 썼던 로시니조차 “나는 평생에 세 번 밖에 울지 않았다”고 고백했는데, “한 번은 나의 첫 오페라 공연이 실패했을 때, 두 번째로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을 때, 마지막으로 선상에서 뱃놀이를 할 때 점심으로 나온 송로버섯을 얹은 칠면조 요리가 배 밖으로 떨어져서 가라앉았을 때였다”고 말했을 만큼,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는 많은 음악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리스트도 젊었을 때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는, “나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든지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든지 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파가니니의 비르투오소(예술의 기교가 뛰어난 사람)적 연주 실력은 많은 음악가들의 부러움을 샀는데, 특히 리스트, 브람스,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음악가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어,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나 <랩소디>를 작곡하도록 만들었으며,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 기교를 자신의 피아노 연주 기법에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젊었을 때 몹쓸 병에 걸려 고생을 하다가 외모도 기괴하게 변하였고, 연주회를 앞두고는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있었으며, 연주 후에는 거의 탈진하다시피 몸져 눕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행적 또한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지면서, 그는 평생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이미지를 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파가니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불우한 일생을 살았지만, 그를 흠모하는 많은 음악가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그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연주회로 벌어들인 수입을 가지고 베를리오즈 등 형편이 어려운 음악가들을 돕는데 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이 그의 외모나 성격적 결함 등을 보고서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의 중심을 보고자 했더라면, 오늘날의 사람들이 파가니니를 이해하고 있듯이 그와 그의 음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파가니니의 작품을 들을 때마다, 청중의 입장에서 음악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음악 자체에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음악과 음악가를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가짐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광열
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에 입사해 줄곧 국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저서로 <종교와 나>, <건설 현장과 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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