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로이 신부, 여성사제수품식에서 강론을 했다는 이유로 파문 위험

여성사제수품식 강론, 파문의 이유

메리놀외방선교회 로이 신부가 교황청의 허가를 받지 않은 로마 가톨릭 여성사제단의 여성사제수품식에서 강론을 했다는 이유로 파문될 위험에 처해 있다. 이 신부를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는 사심 없는 평화의 사도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지만, 관심의 초점은 교황청이 이 신부의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이다. 이러한 상황은 로이 신부에게나 그를 심판할 교회, 양쪽에 다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로이 신부에게 이 사태가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온 봉헌된 삶을 포기해야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복음을 위해 살아왔고, 교회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인권수호자들 중 한 사람이며, 최선의 인간조건을 실현하기 위해 싸워왔고, 사제직의 가장 고귀한 전형을 보여준 한 사람이 기존 교회의 토대를 뒤흔든 희생자로 삶을 마쳐서는 물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태를 다루는 방식은 로이 신부뿐 아니라 아무튼 교회에도 중요하다. 로이 신부는 그동안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해 왔다. 그는 특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대변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수년간 계속된 로이 신부의 삶의 이야기이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 볼리비아 주재의 한 선교사로서, 이 사람은 볼리비아에서 이루어지는 미국의 군사학교 훈련과정을 세상에 알림으로써, 포트 베닝에 기지를 둔 이 미국학교에서 고문 방법 등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한 미국 군사 훈련소는 인권과 공정한 임금을 요구하는 중앙아메리카 농민들을 의도적으로 위협하기도 했다. 이렇게 미국이 자본을 대고 있는 반인권적 전쟁으로 그동안 많은 독재자들은 권력을 유지해 왔다.

로이 신부의 공개적 항거는 처음엔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되었으나 해마다 15,000명 이상 참가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로이 신부 덕택에, 지난 20년 동안 미국 군사학교에서 행해졌던 미국의 정책들은 공개적인 압력을 받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다. 로이 신부의 용기와 믿음은 국가로부터 제재를 받아오기도 하였지만, 그는 완전한 사제이며 완전한 미국인이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이 특별한 이야기가 훨씬 더 큰 존재에 관한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름 아닌 교회가 변화의 한복판에 있는 모든 사회를 특징짓는 양심과 의식의 혼란과 고통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관한 이야기이다. 교회는 이전에도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부끄럽게도 교회의 대응은 역사에 비추어볼 때 언제나 훌륭한 것만은 아니었다.

파문된 성인들의 역사

놀랄 것도 없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연설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전 세계에서 온 주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언제나 신앙의 오류들과 맞서 싸워 왔습니다. 과거에는 최대한 엄격함으로 맞섰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그리스도의 신부는 엄격함이라는 약보다 자비라는 약을 이용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교회는 단죄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가르침이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현재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경건한 체 하는 말도 근거 없는 말도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 수세기 동안 다름 아닌 처벌과 배척이 교회의 특징이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파문된 성인들은 규칙에 얽매인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 메리 워드는 필요 없는 여자 수도회를 창립해서 단죄받았다. 메리 맥킬롭은 주교의 허가 없이 가톨릭 센터를 시작했다고 해서 단죄받았다. 벨기에의 재속 여성 수도공동체 베긴회의 죄는 길을 걸으며 가정 안에서 선교를 한 것이었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의 죄는 진화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원죄 없는 마리아 수도회의 티사 발라수리야 신부의 죄는 아시아 문화권 안에서 원죄론을 전파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이들 모두가 중대한 사회 변화의 선구자들이지만, 교회는 그들의 관심을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처벌하였다.

그러나 소동이 잦아들면, 새로운 교회를 선도했던 성인들을 누가 파문하였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를 못하였지만, 모두가 성인들을 잊지 못하고 성인들이 가르치려 애썼던 것을 믿게 되었다.

수세기 전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성물을 팔자고 한 것, 전례에서 모국어를 사용할 것, '높은' 또는 '낮은' 소명에 따라 사람들을 갈라놓았던 신학을 재검토할 것을 주장하였던 개혁자들 또한 파문되었다. 가톨릭의 정통성을 강요하느라 수차례 전쟁을 치뤘고 쌍방간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자 여려 나라가 갈라졌다. 가톨릭 교리를 위태롭게 하는 여성들을 기둥에 매달아 불태워 죽였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한 여성이 처형되었다. 이 모든 일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저질렀다.

그러나 어떠한 성공을 거두었나? 그 영향은 가슴 아프지만 오늘날까지도 분명하다.

아무도 개혁자들의 "죄"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모두가 교회의 죄를 잊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개혁자들의 관심거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신들의 이 죄를 회개하기까지 무려 400여년이 걸리고 있다. 그래서 개혁자들이 주장하였던 것들이 이제는 마침내 가톨릭 교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 모든 생명들을 앗아갈만큼, 모든 파문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우리는 역사에서 결코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교회법은 개신교 신자와 혼인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파문하였다. 이러한 혼인식에 참석하거나, 금지 사항인데도 가족을 위해 개신교회에서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가족들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었기에 고해성사 감이었다. 훨씬 더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비이성적인 혼인으로 고통을 받다가 결국 비이성적인 이혼으로 막을 내린 사람들은 그러한 장애 때문에 성사를 받을 수도 없게 된다. 이제 누가 성실과 순종의 이름으로 그러한 것들을 옹호할 것인가?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가 아무리 변화를 바랬다 했을지라도, 무엇보다도 가장 가슴 아픈 의문은 그럼 지금은 뭐라도 실제로 변화되었느냐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교회는 두려움과 위협 때문에 다시한번 규범화될 위험에 처하여 있다.

누가 이길 것인가? 강제하는 자들인가? 믿는 이들인가?

피츠버그 강 배위에서 거행된 가톨릭교회에서 인정하지않는 로마 가톨릭 여성사제단체 주최 여성사제서품식에서 미 전국에서 모인 여성12명의 사제서품의식(사진출처-AP=연합뉴스)

행동으로 부르심(Call to Action), 존엄(Dignity), 교구 결정에 더 많은 참여를 모색하는 교구들, 여성사제서품회의 등 곳곳에서 모든 회원들이 파문을 당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몇몇 사제들과 주교들은 버락 오바마를 뽑은 신자들에게 영성체 전에 고해성사를 보라고 말했다. 물론 로마 가톨릭 여성사제단 역시 파문을 당한 단체이다. 미국 가톨릭교회의 3분의 2 이상이 여성 사제서품을 찬성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계속해서 억압과 저지, 무시를 당하고 있다(미국 가톨릭 조사, NCR).

물론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교회를 사랑하라. 그렇지 않으면 떠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가 그렇게 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니 우리도 파문된 사람들로 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 확대를 위해 애쓰는 사제들을 파문하면서, 아이들을 학대하는 소아성애자 사제들을 파문하지 않는 우리는 어떻게 된 것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중 앞에서는 침묵을 지키지만, 친구들과 담당 사제들, 그리고 결국 다가올 미래의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속삭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런 위협이 효과가 있기는 하다.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예를 들자면, 로이 신부를 옹호하는 청원서에 서명을 한 3,000명의 수도자 가운데 33명만이 청원서에 자기 수도 공동체의 머리글자를 사용하였다. 서명한 많은 다른 수도자들은 그렇게 공개하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의 소속 공동체가 알려지면, 벌을 면치 못하리라는 그들의 우려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명을 했다. 그들은 제 신념을 믿고 침묵에서 벗어나 자기 태도를 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이길 것인가? 강제하는 자들인가? 믿는 이들인가? 물론 '이긴다'는 의미가 뭐냐에 달려 있다. 행동을 강요하는 것과 정신과 마음을 영원히 사로잡으려는 시도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역사는 분명히 보여 준다.

내가 선 자리에서 볼 때, 이제 교회는 마땅히 큰 애정과 열린 정신, 경청하는 마음, 그리고 지난 시대처럼 하느님의 미래가 열리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때인 것 같다.

조안 치티스터/베네딕트 수도회

(출처- NCR 2008년 1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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