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 - 36]

가을은 발자국 소리가 크다. 그 소리에 놀라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해간다. 어제보다 더 붉어진 감, 어느새 입을 쩍 벌린 채 땅으로 떨어져 내린 밤송이, 풀숲에 숨어서 자라다가 ‘나 여기 있지!’ 하며 갑작스레 존재감을 드러낸 누런 호박….

아무래도 우리가 안 보는 데서 가을이 어서 부지런히 결실을 맺으라며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손길 또한 하루가 다르게 바빠질 수밖에 없다. 거두기만 하면 끝이 아니라 말리고 추리는 등 갈무리까지 하려면 점점 짧아지는 하루가 안타깝기만 한 나날이다.

그래도 우리 신랑은 좋단다. 바쁘니까 가을 같다면서 거둘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운 눈치다. 어느 날은 이 사람이 하루에 도대체 몇 가지 일을 하는가 싶어 손에 꼽아봤는데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감 따기, 녹두와 팥 따기, 밤 줍기, 불 때기, 열무 솎기, 새끼 꼬기, 땅콩 껍질 까지, 나무하기, 옥수수 갈무리, 먼저 익은 콩 베기, 곶감 깎기….

혼자서 사부작거리며 이리 번쩍 저리 번쩍 그 많은 일을 다 해낸다. 귀농한 여자들의 남편은 머슴이거나 나무꾼이라더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머슴 노릇 톡톡히 하고 있다. 아니지, 다울이가 아빠를 보며 “나도 아빠가 되면 엄마랑 다랑이한테 감도 따 주고 밤도 주워 줄 거야” 하는 걸 보면 제대로 아빠 노릇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가을엔 역시 홍시! 홍시는 가을이 주는 빛깔 고운 선물이다. ⓒ정청라

그에 비하면 나는 건달에 가깝다. 이 바쁜 때 날마다 산에 다닌다. 애초에 산행은 다랑이 풍욕을 위해 시작하게 됐는데, 요즘은 다랑이는 핑계고 나를 위해 산에 간다. 산에 가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고 응어리져 있던 생각이나 감정들도 산산이 흩어진다. 괜한 걱정이나 시름도 한방에 날아가고 다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새 힘을 얻는다. 대체 산이 무엇이기에, 산은 무엇으로 나를 살리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도시에 살 때부터 나는 산에서 힘을 얻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친구들이랑 학교 뒷산에 가는 걸 즐겼고, 그 뒤로도 집 가까이에 있는 산을 자주 찾았다. 직장 생활이 힘들었을 때나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도, 괜스레 마음이 울적하거나 누군가 보고 싶을 때도, 산은 언제나 안식처가 되어 주고 힘을 실어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막혀 있던 숨을 토해내고 마음껏 맑은 숨을 들이켰던 것 같다. 말하자면 아주 오랜 세월, 산은 나의 숨통이었던 것!

그런데 정작 산이 가까운 시골에 살게 되면서 산을 잊고 살았다. 이제는 숨통이 트인다 싶으니까 따로 숨 고르기 할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일까? 그렇게 한동안 집과 논밭이라고 하는 속세에 파묻혀 있다가 다랑이 덕분에 산을 다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맙게도, 정말 눈물나게 고맙게도 말이다.

며칠 전에는 다울이도 함께 데리고 산에 갔는데 다울이가 흙장난을 하다가 땅에 굵은 도토리 하나를 묻어 놓고 왔다. 도토리만 묻은 것이 아니라 가짜 공룡 뼈다귀들(나뭇가지와 돌 같은 것들)도 함께 묻은 뒤에, 나중에 다시 발굴하자며 나뭇가지를 꽂아 표시를 해 두고 왔다. 그런데 어제 내가 다랑이와 단둘이 산에 올라가 호기심에 그 구덩이를 파 보았더니 도토리에 싹이 돋아 있었다. 그간에 비가 많이 와서 땅이 촉촉했던 덕분일까? 그래도 그렇지 불과 이삼일 사이에 도토리 열매가 작은 나무로 자라나다니!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너무나 신기해서 난생 처음 텃밭에서 새싹을 보았을 때와 같은 새삼스러운 감동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산이야말로 성소이며 예배당이 아닐까 하는. 산에 들어가면 허례허식이나 군더더기 없이 신성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있으니까.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을 흐르게 하는 신성을 딛고 그 품에 안겨 뒹굴며 지금 여기의 놀라운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까. 어쩌면 산 흙의 품 안에서 또 다른 생명으로 거듭난 도토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하는 내 오랜 화두에 대한 하느님의 답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산에 가면 내가 찾는 모든 것이 있고, 모든 답이 있다.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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