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2] 떼제 공동체 동아시아 젊은이 모임을 마치고

ⓒ이창훈

동아시아 젊은이 모임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10월 2일부터 닷새 동안 대전에서 열린 이 모임에는 한국과 일본, 중국, 타이완, 홍콩 등 동아시아 나라에서 3백 여 명이 참가했다.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역사적인 이유로 멀리 느껴지는 한 · 중 · 일 세 나라 젊은이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기도하고, 대화하고, 노래하고, 일하면서 친구가 되는 시간이었다.

떼제의 모임이 늘 그렇듯이 하루 세 차례의 공동기도가 모임의 가장 중심이었다. 떼제의 기도는 잘 선택된 성경 말씀과 반복해서 부르는 묵상 노래, 침묵과 짧은 기도문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어, 중국어(표준말과 광둥어), 일본어, 영어 등 5개 언어를 매 기도 때마다 사용했고, 이번에 함께한 다른 참가자들의 모국어(독일어, 스페인어, 크메르어 등)로도 짧은 성구를 읽었다.

떼제의 노래는 영어와 라틴어 위주로 하되,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로도 한 곡씩 불렀다. 한국말이나 중국말로 부를 노래는 악보 아래에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계시도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입니다”하고 한국말로 노래했다. 다양한 언어는 교회의 보편성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여러 나라 말로 기도하는 데에 익숙한 나이지만, 일본말로 노래할 때는 더 특별했다. 3백 명에 가까운 청년들이 한 목소리로, 일본의 정서가 느껴지는 가락에 일본말로 노래한 것이다.

“미요, 교다이가 도모니 스와떼이루! 난토 이우 메구미, 난토 이우 요로꼬비(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것)!” (시편 133,1)

일본 참가자는 12명에 불과했지만, 그 노래는 닷새 동안 이룬 우애의 공동체를 드러내기에 너무나 적합했다. 반일(反日) 교육과 그런 정서 아래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우리 세대는 한국, 중국, 일본의 젊은이들이 신앙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지고 아무 거리낌 없이 일본말로 함께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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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 하더라도 가톨릭과 개신교 여러 교회에서 참가했다. 많은 목사님들과 성공회 수녀님 수련자도 참석해서 가톨릭 사제, 수도자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하느님”이라고 하든 “하나님”이라 하든 아무 문제가 없었다. 소박하고 깊은 기도 안에서 눈에 보이는 화해도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 젊은이들은 마지막 날 오후에 열린 ‘동아시아 우정의 축제’ 시간에 <임진강>(고종한 작곡, 박세영 작사)을 준비해서 일본말과 한국말로 불렀다. 원래 북한에서 불리던 것을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불러서 일본에도 유행했던 노래다. 한반도 분단의 아픔을 노래한 이 곡을 일본 청년들이 연습해서 부른 것이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일본의 참가자 가운데는 역사를 공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모임 동안 한일 관계에 대해 더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친구들과 함께한 소그룹에서 우리 가족 얘기를 할까 말까 끝까지 망설였어요. 사실 우리 부모님은 전쟁 시기에 한국에서 태어나셨어요. 할아버지가 조선 총독을 위해서 일했거든요. 아버지는 ‘조선 친구들을 사귀더라도 절대로 남들에게 그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부모님께로부터 들으며 자라셨대요.

저는 어느 날 교회에서 아버지가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할아버지 세대의 잘못에 대해 사죄하시는 것을 듣고서 알게 되었어요. 모임 동안 소그룹에서 이 얘기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지만 결국 말을 하지 않기로 했어요. 참가자 가운데 일제에 희생된 분의 후손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과거에 한 짓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번 떼제의 모임을 마치면서 우리가 화해를 위해 무언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되고, 정부와 언론에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일본 순례자들은 아베 정권에 화가 나고, 이웃 나라들에게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던 차에 이번 모임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솔직히 최근의 정치 ·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한국과 중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스런 마음을 품고 왔는데, 모두들 너무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기에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지고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단다. 고베의 마리코는 시간을 낼 수 없는 처지였지만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향한 간절한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금요일 비행기로 와서 하루 동안 함께 지내고 다음날 비행기로 돌아갔다. 하루 참가를 허락해 준 것에 대해 거듭 감사하면서.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사이, 또 중국 본토와 타이완, 홍콩 참가자들 사이에도 많은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이번에는 저녁 기도 후의 대침묵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런 만남과 우정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 십자가 주위에서 드린 기도와 토요일 밤 촛불을 밝혀 부활을 경축하는 기도가 이번 순례의 절정이었다. 십자가와 부활로써, 사람들과 민족들을 갈라놓는 두려움과 미움의 장벽을 허물어 화해시키시고 하나로 만드시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평화라고 부르지 않는가? 사실 순례자 모두가 우리 신앙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향하고, 침묵 가운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있었기에 깊은 이해와 소통이 가능했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우애의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었으리라.

이렇게 떼제가 세계 각지에서 벌이는 ‘신뢰의 순례’는 민족과 인종, 교파와 전통, 지역과 세대의 경계를 넘어서 계속되고 있다.

ⓒ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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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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