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새로 지은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와 산 지 2년이 되었다. 얼마 전 재계약을 마치고 얼마나 감개무량했는지 그 감격이 아직 생생하다.

남편이 독립해서 살던 살림살이 대부분을 그냥 갖고 들어오는 이사였다. 새로 마련한 살림은 에어컨, 안방의 붙박이 장롱과 원목 평상 침대, 작은방 책장, 그리고 3인용 좌식 소파였다. 소파와 책장은 인터넷 최저가를 검색하고 나날이 바뀌는 쇼핑몰 가격을 따라서 주문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해서 각각 15만 원 정도 선으로 경매 낙찰 받은 기분으로 고생 끝에 주문했고, 장롱도 역시 150여만 원 하는 걸 어느 쇼핑몰 할인 행사 쿠폰 덕에 백만 원도 안 주고 살 수 있었다. 에어컨이나 원목 침대도 한 번 주문할 때 좋은 거 해서 오래 쓰겠다며 큰 맘 먹고 결정했던 것이었다.

결혼해서 집안 살림 마련하고 이사 몇 번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안다. 얼리 어답터 기질이 있던 사람도 가족을 이뤄 살다 보면, 그 기질이란 게 얼마나 허망하고 거추장스러우며 호사스러운 취미인지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되기 마련이다.

이쯤 해서 “얘는 뭐 하는 앤데, 지 살림 얘기를 쓰면서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라는 칼럼에 기고한 거냐” 할 만한 독자들을 위해 사족을 좀 달아드리겠다. 필자는 몇 년간 성당 직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보니 몰랐으면 좋았을 일을 많이 알게 된다. 솔직히 수두룩하게 얘기할 거리가 많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공개된 지면에 써도 될지 걱정스러운 얘기도 많아 은근한 자기 검열을 벗어나기 힘들었다는 점을 미리 고백하고 싶다.

어떤 얘기가 좋을까 고민을 좀 했지만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수레바퀴의 하나를 맡은 사람으로서, 또 벗어날 수 없고 가끔 사랑스럽기까지 한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답게 일단 살림에 관한 돈 얘기부터 해볼까 하고 내 살림 얘기를 꺼낸 것이다. 불편할 수도 있고, 모르면 더 좋았을 교회 안의 경제 관념 말이다. (좋은 얘기 쓸 것도 아니므로 존칭은 생각하기로 한다. 이이, 그이 등의 표현에 맘 상하지 않으시길.)

개신교 성직자들에 대해서 어떤 인식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흔히 가톨릭 성직자 · 수도자는 ‘순결(독신), 순명, 청빈’의 서약을 한다고 알려졌다. 장벽을 치고 살면 모를까, 사제 · 수도자도 나약한 인간이니, 세상 살아가며 지키기 어려운 세 가지는 서약이라도 해서 스스로 다짐하고 실천하라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 사제 · 수도자들에 대한 교우들의 기대는 상상 이상으로 높아서 옆에서 보기에 아찔할 지경이지만, 그 양반들도 하느님의 어린 양인 실수투성이 인간인 것을….

아무튼, 청빈에 관해 짚고 갈 한 가지. 수도회에 들어간 수도자와 수도회 소속 사제들에게는 세 가지 서약이 유효하지만, 교구 사제들에게 있어서는 청빈의 서약이 빠져 있다고도 한다. 일단 청빈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청빈(淸貧, poverty, paupertas) : 복음적 권고의 하나. 스스로 선택한 단순 소박한 가난을 뜻한다. 자발적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된 자유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 출처 : 미디어 종사자를 위한 천주교 용어 자료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편찬, 201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어느 성당이나 때가 되면 사제도 바뀌고 수도자도 바뀐다. 교사들이 몇 년마다 전근 다니듯 사제, 수도자도 각자의 지위에 따라 근무하는 기간이 다르지만, 교구 · 수도회별로 한 해에 한두 번의 인사 이동이 있다.

그때가 되면 본당 신자들과 직원들은 분주해진다. 대개 먼저 살던 이가 사는 집에 당신들 짐을 그냥 얹어두고 사는 이들이 많지만 가끔은 이중 삼중의 공사를 하기도 하고, 혼자 사는 양반들 특유의 까칠한 주문들이 봇물이 터지듯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먼저 살던 이가 이사 올 이를 위해 집 정비를 해주었는데 새로 온 이의 입맛에 맞지 않았는지, 따로 생각한 구조가 있었는지 말단 직원은 모를 어떤 이유로 내부 공사가 다시 시작된 일도 있었다. (사제가 새로 부임하면 내외부 공사를 못 하도록 하는 지침이 있었다고 들었지만, 큰 힘을 발휘 못 했던 것 같다.)

우리 집에도 하고 싶었던 실크 포인트 벽지 도배, 나도 좋아하는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뽑아주는 고급 캡슐 커피 머신, 가끔 드라마에서 상반신 노출하며 샤워하던 남자 배우들의 머리 위에서 한두 번 봤던 해바라기 샤워기, 고급 가구, 심지어 본당 주변의 지역 유선방송 상품마저 대기업 IPTV로 교체하라던 이도 있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사 다니고 애 키우는 살림꾼으로서 그런 주문을 받을 때마다 흥분하곤 했다. 나는 뭐 저런 거 집에 놓고 살면 좋은지 몰라서 구질구질한 살림살이들을 끌어안고 이사하는 줄 아시나. 차곡차곡 통장에 돈 쌓이는 재미도 잠시, 애 키우고 전세 재계약할 때마다 올라가는 보증금 따라잡으려면 우리는 언제 그런 뽀송뽀송한 살림들을 수시로 바꿔가며 살 수 있을지, 둘이 벌어봐야 뻔한 살림 사는 입장에서 정말 억장이 무너지고 무너졌다.

“자발적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된 자유를 뜻”한다고 사전에도 나와 있다. 진정한 가난을 말하자면 집 걱정도 하고, 차비 걱정도 하고 한겨울에 보일러를 자꾸 끄면 연료비가 더 나온다는 생활상식 공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거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아니고, 예수님도 아닌 약하고 못난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결핍과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나는 사제고 수도자니까 뭔가 초월했다는 위선도 버리면 좋겠다. 부족분을 메우려고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 하는 거 어렵지만, 그 어려운 일 하면서 다들 살아간다. 아쉬운 소리 하기 부끄럽고 치사하니까 쓸 거 안 쓰고 아껴가며 사는 거다.

대부분 사람은 그렇게 세상을 살면서 소비 욕망을 다스려가며 자기 지갑 살펴가며 살아가는데 그게 안 되는 사람, 안 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왜 이렇게 평등하지 못한 건지 앞으로 계속 고민해볼 테다.


림보
(필명)
장래희망 있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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