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법인 설립 25주년 한상봉 발표문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법인설립 25주년 기념 강연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주’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지학순 주교님과 장일순 선생, 그리고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입니다. 지학순 주교님은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마지막 회기를 앞두고 원주교구가 설정되면서, 초대교구장을 지내신 분이고, “빛이 되라”는 사목표어처럼 척박한 지역적 정치적 현실 속에서 교회가 산위의 마을처럼, 뒷박 위에 얹혀둔 등잔처럼, 세상에 빛이 되게끔 열정을 쏟아부으신 분입니다.

교회의 과업이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를 다시 선포하는 것이라면, 그 하느님 나라가 ‘복지(福地)’를 뜻하는 것이라면, 사회복지(福祉)는 이 세상을 복지(福地)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회복지는 단순히 장애인이나 취약계층을 위한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와 탈북자, 이주민과 여성, 아동청소년, 노동자, 농민들에 대한 돌봄이며, 이러한 시회적 약자들의 ‘행복 가능성’을 가로막는 우리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측면의 변혁을 아우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특별히 ‘시설중심의 복지 서비스’는 사회복지의 한 부분이며, 교회는 이 보다 더 확장된 복지개념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와 사회복지

▲ 이집트 피난,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Dure, 1467-1528)
예수는 역사 속에서 잊혀졌거나 ‘그게 되겠어’하는 절망을 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희년)를 새롭게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희망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하느님이 사랑하셨던 백성을 사랑했던 예수가 사랑한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이들의 신앙입니다. 복음서는 예수가 ‘사랑받을만한’ 그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웃사랑 없이 하느님 사랑 없듯이(경천애인 敬天愛人),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의 신원은 백성의 신원과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복지의 주체와 사회복지의 대상을 구분하는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는 누구일까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위태로운 ‘미혼모’였으나 요셉의 도움으로 가정을 꾸렸습니다. 예수와 그 가족들은 한때 고향인 나자렛을 떠나 에집트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했던 ‘이주민’이었습니다. 요셉은 ‘이주노동자’로 객지에서 참담한 세월을 견뎌야 했던 것이지요. 요셉이 일찍 죽고나서, 예수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한부모 가정의 ‘소년 가장’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과부가 할 수 있는 돈벌이는 극히 제한되어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에 속했던 이들은 고아와 이방인과 더불어 ‘과부’였지요.

예수의 아버지는 ‘노동자’였으며, 예수 역시 ‘목수의 작업대 아래서’ 놀면서 성장했으며,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지역에서 ‘농부’로서 농사일을 거들거나 목수일을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목수일로만 생계를 구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만 나자렛에서 5km 정도 떨어진 세포리스에서 대규모 공사를 하였으므로 ‘잡역부’나 ‘건축노동자’로 살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수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집을 떠나 “머리 누일 곳도 없이” ‘노숙인’처럼 살았고, 수많은 ‘신체적, 지적 장애인’들을 만나고, 이들을 치유해 주었으며, 상처받은 ‘병자’를 고쳐주었으며, 하느님나라의 ‘설교자’로 살다가, 공권력에 연행되어 감옥에 갇힌 ‘양심수’였으며,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공권력에 의한 희생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최후의 심판’을 전하며 굶주린 이들과 목마른 이들과 나그네와 헐벗은 이와 병든 이와 감옥에 갇힌 이에 해 준 것이 당신 자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마태 25,31-46참조) 그리고 지금 가난한 이들과 슬퍼하는 자들이 ‘행복하다’라고 선포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온유하고, 의로움을 목말라하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위해 일하고,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이들을 축복합니다.(마태 5,3-12 참조)

가톨릭사회복지가 예수의 행업을 계승하는 것이라면, 사회복지는 이처럼 예수처럼 또 다른 예수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우리 사회의 바닥민중인 노동자, 농민, 실업자와 탈북자와 새터민, 이주민과 노숙인, 고아와 한부모가정 아이들과 미혼모를 돌보고, 차별받는 성소수자와 장애인과 여성을 위한 배려하는 길입니다. 나아가 교도소의 재소자들과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포함한 정치적 양심수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또 다른 예수’이며, 이들을 위해 일하는 이들 역시 ‘또 다른 예수’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사회복지는 ‘예수가 예수를 위해 일하는 거룩한 과업’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브라질의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의 유명한 말을 되풀이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른다.” 사회복지가 ‘자선’에서 ‘정의’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톨릭사회복지는 개인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만큼 사회구조의 개혁을 요청한다는 말입니다.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와 시회복지 

까마라 대주교의 복음서 묵상집인 <까마라와 함께 하는 복음>을 보면, 까마라의 부친은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사제가 되겠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제가 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거니? 얘야. 사제와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결코 같이 있을 수 없는 거란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사제란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야. 사제에게는 오직 한 가지 존재이유밖에 없어. 그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거야.”

▲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
까마라 대주교는 1921년 사제서품을 받고,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교구 보좌주교 시절에 광대한 면적에 흩어져 있는 교구들의 의사소통을 위해 브라질 주교회의(CNBB)를 결성했습니다. 까마라 대주교는 1955년 세계성체대회 이후에, 프랑스교회의 게릴리어 추기경이 "당신의 뛰어난 재능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쓸 생각을 왜 하지 않는가? 빈부의 격차는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한 말에 반응했습니다.

까마라 대주교는 빈민지역인 빠벨라스의 주민들을 위해 일하면서 공공주택을 짓고,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에 출연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모금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가 사회복지사업으로는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브라질에서 국민의 10%밖에 안 되는 부자들은 독일의 32배나 되는 넓은 토지를 차지하는 반면에, 대다수의 민중들은 소작인도 아닌 농업노동자로 전락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매우 평등하지 못한 사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국 등의 다국적 기업들과 결탁한 군사독재정권과 언론은 이러한 현실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더 부끄러운 사실은 교회가 부자와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까마라 대주교는 가난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며, 민중들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삶과 인권을 존중받으면서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복음화라는 자신의 신학을 실천하기 위해 사회사목에 헌신했습니다.

브라질 북동부 올린다와 레시페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된 까마라 대주교는 먼저 민중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도왔는데, 청소부에게 정말 부끄럽게 여겨야 하는 것은 “일하느라 거칠고 더러워진 당신의 손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태도”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특권층과 정부에 대해서는 브라질 사회는 평등하지 못한 사회라고 비판하며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그는 교회내 진보적인 평신도들의 모임을 지원하고, 지역공동체를 후원하고, 성인교육프로그램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진보적인 사제들과 함께 ‘불평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사회참여에 나섰습니다.

특권층 엘리트들이 까마라 대주교를 미워해 ‘사회주의자’, ‘국가전복자’라고 모함하고 살해 위협을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다’는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의 생활방식을 취했습니다. 까마라 대주교는 1965년 거처를 방 세 개짜리 서민 아파트로 이사하고, 주교관을 개방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신학교도 빈민가로 옮겨서 신학생들이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결국 해방신학에 대한 교황청의 압력으로 1985년 은퇴해야 했지만, 1973년 노벨평화상 수상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지학순 주교와 사회복지 :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

한국교회에 이미 수많은 방인 주교가 배출되었지만, 지역공동체의 현실에 주목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핍박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지속적으로 헌신한 주교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밖에 없습니다. 물론 김수환 추기경도 1970년대 한국사회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서울대교구 안에서 지역현실을 뒤바꾸기 위한 구체적인 사목실천은 두드러진 게 별로 없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야말로 ‘추기경’으로서 상징적인 행위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의 현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원주교구가 민주화의 산실일뿐 아니라 협동조합운동과 지역개발사업, 한살림운동 등의 모태 역할을 한 것도,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다 이러한 지 주교의 활동력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 설정 이후 초대교구장으로서 19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에 참석하고서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존재해야 하는 교회의 체질개선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어머니와 교사>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전 교회는 세상을 가르치는 엄격한 ‘교사’이기는 했어도, 세상의 가련한 인생을 보듬어 안기에 충분한 ‘어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자모’일지 모르지만, 비신자를 포함한 지역민에게 어머니가 되기에 교회는 지나치게 완고했습니다.

농촌과 광산촌, 어촌이 대부분인 가난한 지역인 원주교구의 초대교구장이 되면서, 지학순 주교는 문장의 표어를 “빛이 되라(Fiat Lux)”고 지으면서, 이런 사목지침을 내렸습니다.

“▲사회전반적인 면에서 적극 참여하여 정신적인 지도적 위치를 갖자. ▲ 대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협조해 줄 수 있는 그들의 어버이가 되자. ▲ 옳고 바른 것을 솔선수범하여 다른 사람들이 추앙하는 목표가 되자. ▲이렇게 선의의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자. ▲하느님의 새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맑고 아름다운 마음과 생활로 세상에 빛을 주게 하자.”

지학순 주교는 처음부터 자신의 사명을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교회활동에 제한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의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해야 한다는 공의회 정신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그는 교회 구조를 평신도 중심으로 재편하고, 교구민들과 지역민들의 생활상 도움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신용협동조합도 만들고, 학교도 세웠습니다. 필요하다면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기용했습니다.

▲ 지학순 주교
1970년 봄, 서울 YMCA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나와서 버스차장들의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발표를 해서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을 변호했던 지학순 주교는, 급기야 1971년 원주문화방송 설립과정을 둘러싸고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 있는 5.16장학회(나중 정수장학회)의 비리를 경험하고, 이를 비호하는 정부에 대한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교구 차원에서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원주에서 처음 일어난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그해 성탄절에 발표된 사목교서에서는 "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바야흐로 극도에 달한 불평등과 부자유, 억압과 빈곤으로 말미암아 전 민중이 무서운 절망 속에 빠져 있으며 소수 특권층의 끝 모를 부정과 부패, 대중 억압이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이러한 위기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분연히 일어나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이 교서를 발표한다"고 했습니다.

한편 1972년에 때마침 닥쳐온 장마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미제레올 등 국제원조단체를 방문하여 도움을 청하고, 한편으론 원주교구 사목위원회에서 강사를 일하던 장일순을 내세워 평신도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에는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라는 사목교서를 통해 사제들은 사회교리를 탐구하고,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신학과 민중적 사목경험을 배우도록 촉구했으며, “본당과 공소를 모든 교우, 모든 민중의 협동생활의 기지로, 공동체화의 터전으로 발전시키도록” 개방하였습니다. 이 당시 교구에 1만 부 이상 보급한 것이 사회정의와 인간해방에 초점을 맞춘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분도출판사)라는 책자입니다. 1974년 <양심선언>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것도 모두 이러한 생각의 연장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교구든지 가톨릭사회복지회가 주로 사회취약계층으로 분류되는 장애인들과 노인들을 위한 시설 중심의 사회복지에 머물고 있지만, 지학순 주교의 입장에서는 교구 자체가 사회복지(혹은 사회사목)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지학순 주교는 사목교서에서 “우선 본당과 공소에 등록되어 있는 교우 전체에 대한 경제상태별, 직업별, 거주지별 카드를 작성 분류하고, 경제적으로 하층, 직업에 있어 근로자, 농민, 농어민, 영세상인, 소도시 빈민, 거주지에 있어 본당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그들끼리 모여살고 있는가 어떤가 또는 어떤 근로현장에서 얼마만큼만 분포를 보이는지 대체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 대상 교우들의 미사 참례성적을 체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자료 분석을 통해 미사마저도 노동현장이나 집, 아니면 야외에서 틈나는 대로 맞추어 봉헌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미사에서는 강론을 통해 “노동과 빈곤, 비참 속에서 생활하시며,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시는 그리스도”를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교구 자체가 ‘세상을 성화시키는 전위대’가 되도록 격려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지학순 주교의 관심은 오로지 교구영역 안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 교구와 본당과 공소라는 공간을 비롯한 교구민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사제와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전위로서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이는 구호복지의 차원과 사회개혁운동의 차원을 포괄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한 교육과 실천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원주교구 사회복지의 원천, 인성회

현재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등은 카리타스(Caritas)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카리타스란 본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인성회’가 사용하던 명칭입니다. 인성회는 ‘사회’주교위원회에 속해 있었으며, 국제 카리타스의 정회원이고, 아시아 주교회의 연합회 ‘인간발전위원회’(OHD-FABC)에 속해 있습니다. 1975년 6월 25일 설립된 한국 인성회는 지학순 주교가 총재주교였으며, “사회문제에 대해 교회가 복음적인 정신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제시한 교회론에 입각하여, 역대 교황들의 사회회칙 및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서, 한국상황에 대한 한국적 전통과 문화를 고려하여, 현 한국교회의 체질에 맞게 활동한다”고 정했습니다.

인성회 활동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단체, 기관, 공동체입니다. “긴급한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만성적 빈곤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 불의한 제도나 구조로 고통받고 소외받는 사람들입니다.”

인성회는 활동 방법이 다양하지만, 긴급구호와 복지적 접근뿐 아니라, 가난의 원인제거에도 나섭니다. 구체적으로 구호자선활동, 복지사업, 개발활동, 사회활동에 종사하는 단체, 기관, 공동체를 활성화시키고, 격려하며, 조화시키고, 조정하며, 지원하는 접근방식을 선택합니다.

결국 이 모든 활동은 지역교구가 해당 지역 안에서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는 모습을 드러내며,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순절운동’을 강조하며, 이웃사랑의 실천,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사회의식 고취를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투신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훈련을 위해 연수회, 세미나를 개최하고, 사회사목에 필요한 제반 정보와 자료를 발간했습니다.

원주교구 역시 1976년 원주교구 인성회를 조직하고, 이후 1983년에 원주교구의 대사회적 활동업무를 총괄하는 ‘사회사업국’(초대국장 최기식 신부)이 만들어지면서 이 안에 ‘사회복지부’와 ‘사회개발부’가 포함되고, 1990년 사회사업국은 사회선교국으로, 1995년에는 사회선교국이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가 1988년 법인설립 되면서, 지난 25년 동안 정부지원사업과 병행하여 규모가 큰 생활시설과 이용시설을 확충함으로써 ‘종합복지사업’으로 발전합니다.

여기서 ‘발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회복지분야에서 규모상 커지고, 전문역량이 깊어졌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러나 본래 가톨릭사회복지회의 모태인 인성회의 설립취지에 비추어 볼 때, 사회사목적 측면이 도외시된 발전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는 정부지원이 가능한 시설 복지 중심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사정은 대부분의 교구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회복지회가 아닌 다른 교구의 부서에서 사회사목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교구청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사목국’이 있으며, 위원회 구조로 매스컴위원회, 민족화해위원회, 사회선교위원회, 이주사목위원회, 정의평화위원회가 있지만 이 활동들은 담당 사제와 일부 위원들의 활동에 머물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실제로 이들 사회사목 과련 위원회에 얼마나 예산이 투입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형편이 다르기에 절대비교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참고로 서울대교구의 경우에는 가톨릭사회복지회와 별도로 노동사목위원회, 노인복지위원회, 단중독위원회, 빈민사목위원회,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정의평화위원회, 한마음한몸운동본부, 환경사목위원회 민족화해위원회 등이 있다. 이들은 사회사목센터 등을 통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물론 서울대교구의 경우에도 충분히 예산이 편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비교적 사회사목 분야가 활성화되어 있는 편입니다. 실상 1970년대~1980년대까지 이 모든 사회사목적 지원은 ‘인성회’가 감당했던 몫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과연 원주교구가 지역의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과 교육과 연대와 문제해결에 얼마나 심도 있게 접근해 왔는지 성찰해 봐야 합니다. 혹시 ‘돈이 되면서 성과도 남는’ 사업에 집중해 온 게 아닌가,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며,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어 주고, 때로는 행정당국과 마찰을 빚더라도 ‘인권’을 위해 투신해야 합니다. 사실상 우리 사회의 정의평화운동은 ‘정의평화위원회’만의 몫이 아니며, 이주민 문제는 단지 ‘이주사목위원회’만의 고민거리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민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구의 모든 본당이 ‘사회복지’뿐 아니라 ‘사회사목’의 전진기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교구는 이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신자들을 양성하고, 영적 물적 지원을 제공하고,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사회복지와 사회사목을 통합할 수 있는 구심이 필요합니다. 이 역할을 명칭상 ‘사회선교위원회’가 맡든 새로운 구조를 가동시키든, ‘장애인을 비롯한 취약계층을 위한 서비스’에 교회의 과업을 제한시키지 않는 한, 교회는 노동자, 농민, 빈민, 장애인, 병자, 노인, 아동, 청소년, 성소수자, 양심수, 재소자, 중독자, 이주민, 새터민 등을 위한 지원과 연대, 그리고 인권과 정의, 평화와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고, 이러한 사안이나 사람들을 위해 투신하는 개인, 기관, 단체, 공동체를 지원하고 연대하는 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교회와 그리스도들이 ‘고독하게’ 맡으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역에는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있으며, 다양한 활동가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는 기관, 단체, 공동체가 있습니다. 비록 이들이 가톨릭신자나 단체가 아니더라도 지역 안에서 ‘선의의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비근한 예로, 가톨릭사회복지회 활동가(복지사)가 법적 권리투쟁에 나선 장애인단체와 연대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시설복지에 목매고 있는 현실에서는, 행정당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시설 내 관리’에 치중할 뿐 클라이언트들의 법적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을 꺼립니다. 어떻게 보면, 복지회가 복지대상자의 ‘복지’를 다른 방식으로 배신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설 안에 포섭된 사람들만의 복지를 생각할 뿐,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 게 가톨릭사회복지의 현실입니다. 이를 두고 사회교리에서 강조하는 ‘연대성의 상실’이라고 불러도 좋을까요.

가톨릭일꾼운동과 사회복지

1. 영적 갈망에서 시작하는사회복지

사회복지는 정부든 교회든 공신력과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집단이 ‘사회적 취약계층’을 돌보는 데 치중한다. 즉, 시설과 자원을 통해 시혜를 베푸는 ‘기관’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설을 유지하고, 복지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합니다. 결국 복지사들의 박봉과 장시간 노동에 의존하면서 ‘복지사들의 복지’를 외면하거나, 봉사자들을 ‘단순봉사’에 동원하면서 소진시킵니다. 또한 기업처럼 복지시설은 ‘끝없는 복지사업의 확장’에 매달리게 되면서, 가톨릭사회복지와 일반 사회복지의 차별성은 순식간에 증발됩니다. 사회복지사업의 목표가 ‘복지의 확대’에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 도로시 데이
그러나 가톨릭 복지활동(‘사업’이 아니라)의 다른 시도도 있습니다. ‘영적 갈망’에서 출발하는 복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느님께서,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백성들’이기 때문이며, 복지의 확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복지활동에 투신하는 나의 영적 성장’ 즉, 나의 성인됨에 있다고 믿는 운동입니다. 이들은 복지활동을 통해 그분의 손길을 경험하고, 자신이 그분께 더욱 가까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 속으로 투신합니다. 복지활동뿐 아니라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신 속에서도 그들은 그분을 경험합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가톨릭일꾼운동’(Catholicnews Worker)입니다. 일꾼운동은 1931년 미국의 대공황기에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에 의해 시작된 평신도운동입니다. 피터 모린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추구하는 ‘푸른혁명’(Green Revolution)에 대한 비전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일상적 자비행으로 ‘환대의 집’을 열었고, 원탁토론회를 통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장애인과들과 더불어 농경공동체를 이루었고, 자신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완전한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장하고, 노동자들의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이들 주변에는 신학자들과 봉사자들이 있었으며, 정부와 기업의 지원 없이 소액후원에 의지해 일을 계속해 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손길은 신자 비신자 가리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든 언제든 열려 있었습니다.

2. 사회복지 시설과 단체 "사랑을 배우는 학교"

가톨릭일꾼운동은 철저하게 개인에게 주목합니다. 그 개인의 영적 성장에 최종 관심을 두고,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여정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원탁에서 이야기할 수 있고, 시간이 허락한다면 언제든지 환대의 집에서 제 가진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담긴 신문을 친구나 이웃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농장에서 원하는 만큼 일을 하고 쉴 수도 있습니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세세한 규칙이나 정해진 계획 속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갈망과 영성을 서로 나누고 격려하고 공유할 뿐입니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일상과 교회와 사회와 우주에 걸쳐 얼마든지 주제를 확장해 갑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 안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평신도 중심의 이 운동은 사제와 수도자들과 동행합니다. 사제와 수도자들은 흔히 교회단체에서 보듯 ‘지도사제’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 카리스마에 따라서 일꾼운동을 도우며 함께 걷습니다. 특히 신학자들은 일꾼운동의 목표와 활동방식, 영성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지원에 나서지요. 토마스 머튼과 헨리 나웬 역시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평신도 신학자들도 동행하고 있습니다. 영적 신학적 지원이 없다면 가톨릭운동은 그 본질적 성격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조직운동이 아니라 네트워크 방식의 운동입니다. 기본적으로 봉사자들은 전국에 산재한 ‘환대의 집’을 근거지로 모이고, 이들은 <가톨릭일꾼> 신문을 통해 영적 자산을 나누어 갖지만, 재정과 조직 면에서는 독립적으로 활동합니다. 또한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는 ‘환대의 집’은 일정 규모 이상으로 키우지 않고, 투신하려는 이들이 늘어난다면 새로운 ‘환대의 집’을 또 다른 곳에서 시작하도록 조언합니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일종의 캠프, 즉 사랑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봉사자들은 자유롭게 합류하고 언제든지 캠프를 떠날 수 있습니다. 가톨릭일꾼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이 봉사와 헌신을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배우고 그 자비를 자기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조직 확장은 일꾼운동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가톨릭일꾼운동은 신문을 발행하고, 환대의 집을 운영하고, 농경공동체를 이루면서 정부와 교회, 기업 등에서 어떤 재정적 도움도 받지 않습니다. 순전히 선의에서 내어주는 개인들의 후원금만으로 운영하며,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느님의 사업이라면 그분이 배려하실 것을 믿습니다.

3. 본당은 가톨릭사회복지의 전진기지

한국사회 안에는 수많은 사회복지시설이 있고, 동사무소마다 복지사가 결합되어 있으며, 법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확충되어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아직까지 정부는 직접 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것보다 특히 종교기관에 시설을 위탁경영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그중에는 꽃동네처럼 대규모 복지단지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군소복지관도 상당합니다. 그중에서 성공회와 원불교 등은 후발주자로서 복지사업에 뛰어들고 있으며, 각 종교는 저마다 시설유치 경쟁에 나서고 있습니다.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면” 나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이러한 사회복지는 정부가 맡아서 책임 있게 관리하는 게 맞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이런 복지환경에서조차 소외받고 있는 다른 이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가톨릭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시설복지를 아예 포기하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기존의 사회복지사업과 병행해서, 교구 차원의 다른 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예전에는 교구마다 주교관 옆에 구빈원을 두었다. 여기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것이 가톨릭일꾼운동의 ‘환대의 집’이다. 같은 형식일 필요는 없지만, 교회는 지역마다 본당이 있고, 그 지역 안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통받는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각 본당이 이러한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센터가 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성당 안에 생협이 있듯이, 노동상담소도 있고, 무료식당도 있고, 또 그 지역에서 절박하게 요청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테지요. 그리고 그 지역 안에서 활동하는 다른 종단이나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만나 지역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활동에 나설 수도 있겠습니다. 본당에 있는 교리실 등 공간을 제공할 수도 있으며, 지역민을 위한 교육기관의 역할을 본당이 수행할 수도 있겠지요. 또한 서로 다른 본당의 물적 인적 자원을 교류하며 나눌 수 있겠습니다. 이게 친교의 교회이고, 세상을 위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 자신을 위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듯이, 교회는 교회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신자들이 삶을 통해, 본당 내 신앙생활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신앙은 취미생활에 머물거나 관념적 신앙에 그칠 것입니다.

사회복지는 사회사목이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분명히 할 것은 사회복지는 사회사목의 지평 안에서 완성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회사목을 ‘사회복지’에 환원시켜 왔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가톨릭일꾼운동의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이들의 당장의 필요에 응답하는 ‘복지’와 가난을 구조화시키는 권력구조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운동’을 통합시킬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교회의 사명은 ‘정의로운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며, 이 과업이 하루 아침에 성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 대한 구조활동에 나서는 것 또한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일이며, 교회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성사가 되는 길입니다. 전통적인 표현대로라면, ‘정의를 포함하는 자비’에 주목함으로써, ‘자선과 정의’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를 재구조화시키는 일이 곧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천명한 ‘교회쇄신’일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지체와 구조가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여기 계신 한분 한분이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마련되길 갈망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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