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래서... 사랑하고 그분은 그래도... 사랑하시고 -조희선 ‘차이’ 빙앤두잉, 잘 살기 세상을 살면서 ‘돈벌이’란 꼭 필요한 것이면서 참으로 비루한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헐렁한 바람을 가슴팍에 맞이하는 것이면서 때로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달라붙어야 하는 것이면서 내처 두어야 뒤따라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욕심처럼 손에 쥐기 어렵
그들이 나를 죽이는데 성공한다면, 당신은 내가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며 죽었다고 신자들에게 전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확신을 갖기만을 바랍니다. 한 주교는 죽지만 하느님의 교회, 즉 민중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로메로 대주교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시고, 연이어 그해 3월 12일은 지학순 주교(전 천주
우리는 민중들의 외로움과 그들의 가정문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영위하는 의미없는 삶에 주목한다. 오늘날 우리는 특히 가난으로 인한 불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이 가난을 신앙의 빛으로 바라보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벌어져 가는 격차를 그리스도인 실존에 모순되는 수치로 본다. 소수의 사치는 거대한 대중의 비참한 가난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가
노동의 새벽 새벽이었습니다. 용문까지 가려면 먼길이어서 이른 시각에 깨어 길을 나서야 합니다. 첫 전철을 탔을까요?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일곱 시 가까이 되었더군요. 천주교 서울대교구 용문청소년수련장에서 아침 아홉시부터 강의를 해야 합니다. 새벽, 하고 부르면 벌써 푸른 잉크가 백지에 번져오는 걸 느낍니다. 밤새 어둠 속에 웅크리던 삶의 생생함이 기지개를 펴
인연의 그물망내 젊음이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만난 몇몇 소중한 인연들이 있습니다. 삼십대를 통틀어 노상 만나던 사람들은 대개 가톨릭신자였습니다. 신자라 해서 모두가 똑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살면서 똑똑하게 배웠습니다만, 그마저도 끌어안아야 한다는 것을 사십대 중반을 넘기면서 새로 배우고 있답니다.저마다 제가끔 생애가 가르쳐준 소중한
' 그렇지, 밤비 후득이는 오동잎이 우리 생이지 후득여도 너울대는 게 그게 생이야 소주 생각 간절한 밤비 속 우리 생이야 _장석남, 「밤비」 중에서 2009년 3월 26일에 라는 인터넷신문사가 정식 창간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일 년 넘게 인터넷카페 형식으로 언론활동을 해 왔지만, 정식으로 언론사 등록을 하고 일을 시작한 것은 얼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 안도현 타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네.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지나쳤음을 알았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네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네. - 중국 명나라 문인 진계
‘마리아’에 대한 기억어머니, 하고 부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등이었습니다. 내 기억의 끝닿은 데로 가 보면, 어머니 등에 업혀 인천 도화동 성당엘 가서 발돋음 하며 미사를 ‘구경’하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그것은 제 가장 오래된 기억일 것입니다. 대여섯 살 때였을까요? 잘 모릅니다. 그저 제대에서 벌어지는 일이 궁금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을 위해 교회 미술품을 팔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1967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을 선포하였고 메델린에서는 중남미 주교회의가 열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안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바야흐로 권위주의적이고 부자들을 위한 종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복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 토마스 머튼은 1961년부터 가톨릭계 간행물을 통해 군비경쟁과 냉전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도로시 데이가 피터 모린과 창설한 가톨릭일꾼운동의 영향이 컸다. 머튼은 '가톨릭일꾼' 신문에 '전쟁이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했으며, 도로시 데이와는 죽는 날까지 동지로 지냈다. 1962년에
홀로있는다는 것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에서도 평화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질문했다. 이 혼란스런 세상에서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 물었다. 그는 26년 동안 수도원에서 침묵 속에 살면서 글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리포터로 살았을 뿐 아니라 세계를 관찰하는 리포터로 살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1968년 12월 10일, 성탄절을 며칠 남겨 두지 않고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한 지혜와 사랑을 역설했던 토마스 머튼이 53세로 이승을 떠났다. 그는 방콕에서 아시아 지역의 관상수도회 원장들 모임에 참석해 마르크스주의와 가톨릭교회의 관상수도원운동에 대해 강연을 했으며, 달라이 라마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날 강의를 마치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선풍기에 연결
오는 3월 24일은 엘살바도르의 순교자, 로메로 대주교의 서거 29주기다. 로메로는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데인에서 열린 중남미주교회의에서 선포한 모든 것을 표상하고 있다. 그는 절대 다수가 가난한 엘살바도르 민중을 대변할 뿐, 어느 정당이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지도 않았다. 그는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였다.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을 때마다 로메로 대
네덜란드의 영혼 순전히 빈센트 반 고흐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러 간 뒤로, 그의 행적을 뒤쫓다 보니, 그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사람이었고, 특별히 고흐에게서 영적 위로와 비전을 찾았던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낯이 익은 사람이었으나, 알아갈수록 다른 얼굴이 돋아났습니다. 그는 헨리 나웬(Henri J.M. Nouwen)입니다.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