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연인, 헨리 나웬(1932-1996)

 

네덜란드의 영혼

순전히 빈센트 반 고흐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러 간 뒤로, 그의 행적을 뒤쫓다 보니, 그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사람이었고, 특별히 고흐에게서 영적 위로와 비전을 찾았던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낯이 익은 사람이었으나, 알아갈수록 다른 얼굴이 돋아났습니다. 그는 헨리 나웬(Henri J.M. Nouwen)입니다. 로널드 롤하이저는 <거룩한 갈망>이라는 책을 그에게 헌정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우리시대의 키르케고르입니다. 자신의 노력을 나눔으로써 그는 우리가 기도하는 법을 모를 때 기도하게 해 주었고, 쉬지 못할 때 쉬게 해 주었습니다. 유혹을 받을 때 평화를 찾아주었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 빛의 구름에 둘러싸이게 해 주었고, 의혹 속에서도 사랑하도록 도와주었으며,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마도 나는 키르케고르도 만나러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토마스 머튼과 장 바니에, 그리고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 거슬러 올라가면 에라스무스 한테도 닿을 것이라 여기면서, 나웬을 만나러 갑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거리를 헤매거나 박물관에 갈 필요는 없겠지요. 얼마전에 함께 독서모임을 하는 친구가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책인데요...”하면서 건네준 책 한 권으로 족할 따름입니다. 그 책은 ‘하느님의 연인, 헨리 나웬’이라고 청록색 바탕에 백발로 제목을 새겨 놓았더군요. 하느님을 연모하던 이가 헨리 나웬이고, 아마도 그분 역시 나웬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헨리가 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갈망함으로써 그 사랑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린 교회의 사제, 헨리

헨리 나웬은 1932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네덜란드는 상업국으로서 다른 나라에 비하여 종교적으로 관대한 나라였고, 개신교나 유다인 등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자유로운 정신이 에라스무스와 같은 개혁적 학자를 낳기도 하였답니다. 사람들은 종교공동체마다 거주지를 정해서 살며 서로 교류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가톨릭 거주지에서만 자란 헨리는 25살이 될 때까지 불신자나 이혼한 사람이나 개신교인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네덜란드 가톨릭교회도 자기 틀 안에서 아주 보수적이고 획일적인 모습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크게 변화됩니다.

네덜란드 주교들은 대단한 용기로 나치에 저항했습니다. 나치에 협력하지 않은 것은 물론, 유다인 강제 수용과 학살에 항의했지요. 이렇게 가톨릭교회가 히틀러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자 유명한 네이메헌 가톨릭대학교는 폐교되었지요. 수많은 네덜란드 신자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여기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벽이 허물어집니다. 그들은 군대와 감옥과 정치범 수용소에 함께 감금되었고, 서로가 지닌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전쟁이 끝난 뒤에는 통제와 억압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고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네덜란드 교회는 더 이상 권위적인 종교가 통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렇게 가톨릭교회가 개방적인 모습으로 나아가는 시점에 1950년 헨리는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이 당시 네덜란드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 전인데도 실험적인 전례운동이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자국어로 전례를 거행하고 손으로 영성체하는 것, 해설자나 독서자를 허용하는 것 등등. 그러므로 바티칸공의회에서 그들 네덜란드 주교들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영원한 소년으로 남아

헨리 나웬이 사제가 되고나서 공부한 분야는 임상심리학이었는데, 그는 두 번에 걸쳐 박사학위를 받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면서 실험과 통계에 의존하거나, 병리학과 임상 조건 분석에 치중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을 뿐더러, 이런 방법이 헨리의 기질상 영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학자 타입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가에 가까웠으며, 심리학자 융이 말하는 ‘영원한 소년’의 특성을 지녔습니다. 소년은 의존감정이 아직 남아있지만, 한편으론 이상주의적이며 늘 새로운 계명을 불러오는 자유로운 정신을 갖게 합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일반적 지식과 주석서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직관과 창조적 영감,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 경험을 통하여 새롭게 내용을 재구성하였습니다. 일종의 영적 성장통(成長痛)을 겪으면서 성찰한 것이 <탕자의 귀환>이라는 책입니다. 늙은 아버지가 탕자를 끌어안고 있고, 경멸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큰아들의 모습을 담은 렘브란트의 그림을 묵상하며, 헨리는 자신을 탕자와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묵상이 깊어지면서 큰아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하였고, 결국 모든 것을 용서하고 피난처를 제공하며 겉옷으로 감싸 안아 주는 아버지가 될 필요성을 깨닫습니다. 사랑을 갈망하던 소년은 그렇게 자비로운 아버지가 됩니다.

사실 헨리는 엄격하고 야망을 지니고 있던 아버지에게서 사랑받지 못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헨리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는데, 헨리는 다른 이들의 작은 거부에도 깊이 상처받고 무너지곤 했지요. 그는 인정과 지지를 받으며 활짝 피어나지만, 작은 비난에도 우울증에 시달리곤 했답니다. 이런 경험 속에서 헨리는 남들이 자신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더 이상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선물을 발견하게 되면,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네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과 네가 소중히 여기는 네 자아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너의 진정한 소망에 응답할 힘이 네 안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를 수 있다. 그럴수록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심원한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그런데 너에게는 다른 이들의 영향력에 쉽게 굴복하는 나약한 면이 있다. 누군가가 네 행동의 동기를 물어오면 너는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 사람의 주장에 동의하고 만다. 그렇게 너는 수동적으로 다른 사람이 너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 더 너는 내적 자아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느님의 첫 번째 사랑에 대한 응답

타인의 평가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 길을 열어준 것은 하느님이 주시는 첫 번째 사랑 때문이었다고 헨리는 고백합니다. 예수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헨리는 복음서에서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전도하기 시작하실 무렵, 그 길고도 운명적인 여정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하느님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축복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고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제 가거라.” 그 축복으로 예수는 강해졌고,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에 맞설 수 있었고, 그 후로도 숱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의혹과 두려움과 세상의 거부 앞에서도 늘 당신을 축복하셨던 그 목소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헨리는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집은 내 존재의 중심입니다. 거기서 나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에게 나의 사랑을 주노라’하시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나도 그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과거에 내게 말씀하시던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목소리는 아무런 방해 없이 영원으로부터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로부터 우리는 언제나 생명과 사랑을 받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나는 하느님과 함께 집에 있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과 예수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대부분 상상조차 못한다고 헨리는 말합니다. 스스로 비참하고 불안정하고 죄와 수치심으로 가득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유혹을 이겨 내셨듯이 우리도 이런 부정적 감정을 이겨 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사실상 가장 큰 유혹은 명성이나 재물이 아니라 자기 거부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내가 하느님의 눈에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는 동안에 우리가 겪은 수많은 좌절에서 나온 ‘세상이 외치는 소리’일 따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나 성인들뿐 아니라 우리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받는 아들이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소중한 아들 딸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와 우리는 한 식탁에 앉은 한 가족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곧 나의 길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헨리는 예수께서 숨쉬던 성령을 우리도 숨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는 우리의 몸을 통해 거듭하여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실로 참된 구원은 그리스도가 되는 데 있습니다.”(여정을 위한 빵)


새벽으로 가는 길

1996년에 세상을 떠난, 헨리 나웬은 꽤 유명한 영성작가이며 사제였지만, 그에게 예비된 삶은 다른 곳에서 무르익었습니다.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수많은 강연에 초청받았으나, 그는 또 다른 길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시토회 수도원에서 관상생활을 하기도 하였고, 제3세계 선교사가 되려고 페루 리마 근처의 빈민촌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헨리는 토마스 머튼과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만나 해방하는 영성과 관상생활을 접하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로 내려가는 길을 통하여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복음서의 명령을 받아 안게 된 것이지요. 한편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전환을 일으킨 것은 그의 친밀함에 대한 욕구와 하느님 안에서 성취되는 우정에 대한 깊은 갈망이었습니다.

결국 기도에 대한 응답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새벽’(Daybreak) 공동체에서 왔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는 멤버들이 모여 사는 이 공동체는 장 바니에가 세운 라르슈 공동체 가운데 하나입니다. 헨리는 자신을 그저 ‘한 사람’으로 받아준 데 대해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놀라움과 기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저명 교수나 지도자로서 남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은 아예 없습니다. 이들은 나웬의 책을 알지도 못하고, 책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장애인들이었지만, 연약하게 부서진 몸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게 해주는 곳입니다.

여기서 그는 공동숙소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아담처럼 가장 장애가 심한 이를 돌보게 됩니다. 이는 마음을 다해 자신을 정화하는 시간이었지요. 이전의 학구적 삶과 동떨어진 삶이었고, 달변가인 헨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과 더불어 공동체와 우정을 배우고, 사람을 돌보는 직무에 전념했던 순간들입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무능함을 경험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들과 형제가 됩니다. 헨리는 연설가, 작가, 상담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토스트를 굽거나 차를 끓일 줄 몰랐습니다.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에는 서툴렀던 것이지요. 다른 유명인사들처럼 특별한 재능 이외의 방면으로는 아주 무능했습니다. 헨리는 자신의 어려움을 감추지 않았으며, 드러내고 이 일들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여전히 소년의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헨리 나웬은 새벽공동체에서도 여전히 높이 날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었지요. 처음 도착 당시에 헨리는 새로 구입한 자신의 자동차를 선임자와 함께 타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흥분한 어조로 자기가 얼마나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했는지 장황하게 늘어놓던 그 순간, 갑자기 자동차는 어딘가를 들이박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임자가 말했습니다. “이 차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군요.”

헨리는 이 공동체에서 안식을 찾았습니다. 그는 그동안 마음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많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추구해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의 단순함과 공동체의 사랑이 그에게 스며들어 그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헨리에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을 보여주는 복음서의 의미를 생생하게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연인, 우정 가운데

헨리 나웬은 스스로를 사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평범한 신자 쪽에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자기 이름의 가운데 이니셜 ‘J.M.'은 ’Just Me'를 뜻한다고 헨리가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헨리는 보통 사람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상대방의 수준에서 대화하려고 노력했으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친구로서 손을 내밀고 감동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연인, 헨리나웬>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지요. 아일랜드 출신의 은퇴한 노동자인 마이클 플러드가 암에 걸려 죽을 날만 손꼽고 있었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잘 알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생면부지의 헨리에게 보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누었는데, 어느 친구가 플러드에게 물었습니다.

“나웬같이 훌륭한 사람이 자네처럼 촌스럽고 보잘것없는 노동자와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뭔가?”
플러드가 아일랜드 민요풍으로 답했다네요.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자네는 헨리 나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네.”

헨리는 성찬 전례에서 성배를 들어 올리는 순간 플러드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 플러드는 암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보여준 사랑과 우정이 죽음을 이기게 하였고, 그가 ‘하느님의 연인’임을 보여준 것이겠지요. 하느님의 연인은 가난한 모든 이들의 연인이 되어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헨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가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 때문에 항상 마음을 다쳤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없이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지위를 탐하는 이도 아니었지요. 그는 개방적인 사람이어서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자기 책을 주거나 나중에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꽃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돈이 꼭 필요한 사람들, 뜻있는 기획안을 들고 온 사람들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환자에게 힘을 북돋아 주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범한 관대함이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사랑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동성애적 사랑의 에너지가 그로 하여금 사람들과 맺는 친밀한 우정에 더욱 마음쓰게 하였으며, 그 딜레마를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하는 법입니다.

성체성사, 부서진 이들과 함께

헨리 나웬에게 가장 중요한 영감을 준 것은 성경과 성체성사였는데, 특별히 그는 새벽공동체에서 부서진 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더욱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에게 성체성사는 단순히 가톨릭신자끼리만 나누는 배타적인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체성사를 예수의 삶과 소명의 핵심으로 이해했으며,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식탁에 앉도록 손을 내밀어 초대하셨다고 믿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할 때에도 낮은 탁자로 만든 제대 앞에서 다른 이들과 나란히 앉았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께서 사람들과 더불어 친교와 우정을 나눈 자리입니다. 그것은 빵을 집어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쪼개어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울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가정에서 매일 같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식탁이 제대가 되고, 우리의 음식이 성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개신교 신자든 가톨릭 신자든 누구나 이 식탁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웬의 제대 곁에선 누구나 온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과 편안함으로 영성체를 합니다.

헨리 나웬은 2천년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존하는 가톨릭교회의 성체성사가 오히려 예수를 더욱 멀리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반복되는 예식과 기도문은 지루해지고, 소박함은 사라졌지요. <불타는 마음으로>에서 그는 “우리는 성체성사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제의, 초, 제대 봉사자, 커다란 책, 추켜올린 팔, 넓은 제대, 성가, 사람들... 이 모두가 단순함과 평범함을 잃고 불분명해졌습니다. 예식을 진행하고 의미를 이해하려면 안내가 필요한 형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즉, 미사에서는 성체성사의 공적이고 조직적인 특성만 너무 강조하다가 결국 개개인의 삶과 맺는 연관성을 찾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는 자기 잔에 담겨진 삶의 특수한 상황 안에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지 결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예수가 “너도 이 잔을 들겠느냐?”하고 물으실 때,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지 묻는 것이 성체성사라는 것입니다.

/한상봉 2008-04-12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