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한상봉] Simone Weil (1909-1943)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 안도현

타고난 연민의 사람

▲ 시몬느 베이유
시몬느 베이유는 유대인 출신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심취하였으나 세례받지 않았고, 철학교사이면서 노동자들의 좌절과 희망을 나누어 가졌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조국 프랑스를 사랑하였지만 온 세계 민중의 해방을 더욱 크게 갈망하였고, 투철한 혁명가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신비주의의 그늘 안에 머물렀습니다. 격렬한 노동운동과 반파시즘 저항운동의 와중에서도 연민과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경외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독일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그녀를 ‘현대의 성자’라고 말합니다.

그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알랭은 플라톤이 지성과 감성만 논하면서 인간의 위(胃)를 무시했다고 지적합니다. 창자와 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곧 굶주림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삼았으며, 그 소식이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이요, 예수는 그 나라를 잔칫집으로 즐겨 비유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에게 도전한 사탄의 첫 번째 유혹이 돌로 빵을 만들라는 요구였으며, 그분은 배고픈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합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이며 자비입니다.

베이유는 천부적으로 탁월한 공감(共感)능력을 가진 여성이었지요. 그의 동기생 시몬느 드 보봐르는 자전적 소설 <처녀시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베이유는 고등사범학교에 갈 준비를 하면서 소르본느에서 나와 똑같이 자격증을 따고 있었다. ... 당시 중국이 극도로 황폐되고 인민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자, 그녀는 벌써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는 계급과 민족,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 깊었습니다. 스페인 내란 당시였지요. 스페인은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공화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를 지키려는 인민전선과 파시스트 정권을 세우려는 프랑코 반란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 싸우는 인민전선의 공화군을 돕기 위해 당시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인민전선에 자원입대합니다. 그중 에밀 졸라와 바이런이 유명하죠. 시몬느 베이유 역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 참여합니다.

공화군과 프랑코 군대의 뺏고 뺏기는 싸움 속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갔죠. 공화군 안에서도 노선 차이로 다툼이 일어나고, 당시 교회가 프랑코를 지지했기 때문에 스파이로 몰린 사제들도 무자비하게 처형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농민들을 위한다는 인도주의에 이끌려 전쟁터로 나왔지만, 전쟁의 비정함에 익숙해지면서 살인에 대한 끔찍한 희열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베이유가 왜 사회적 실천을 넘어서 종교적 신비주의로 나아갔는지 이해하게 해줍니다. 본래 먹었던 생각과 다르게 인간성이 파괴되는 전쟁을 혐오하고, 스스로 죽임을 당할지라도 타인의 목숨을 빼앗지 않으려는 비폭력의 정신을 배운 것입니다.

베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어서도, 부유한 부모를 따라서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고, 나라 잃은 프랑스인들과 함께 고난에 찬 연대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녀는 영국에 있는 망명정부의 모리스 슈만 밑에서 일을 했는데, 이곳에서 베이유는 프랑스 난민들에게 배급되던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똑같이 먹으며 지냈습니다. 결국 평소에도 병약했던 베이유는 여기서 병을 얻어 1943년 8월 24일 서른 네 살의 나이로 켄트 주 애쉬포드에 있는 요양소에서 죽었고, 그가 쓴 책들은 그녀가 죽은 뒤에야 세상에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보다 1년밖에 더 살지 못한 시몬느 베이유는 고통받는 세대와 더불어 고통받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였습니다.


스스로 노예가 되어, 노동자가 되어

생전에 시몬느 베이유의 관심은 늘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의 얼굴에 꽂혀 있었습니다. 이 비참한 세계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을뿐더러 그 영혼이 점점 그 안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에 항거하며 가련한 노동자의 벗이 되어 주었죠. 1931년 르퓌(Le Puy) 중학교에 철학교사로 발령을 받은 베이유는 셍테티엔느의 노동자들을 만나러 한 주일에 한 번씩 르퓌에서 셍테티엔느까지 여행을 했으며, 봉급을 받으면 책을 사서 노동자들에게 나눠주었죠. 노동자들도 인류가 낳은 문화적 지적 유산을 골고루 나눠가질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광부들과 함께 빵을 먹고, 선술집에서 노동자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의 처지가 그러하듯이 겨울에도 난로를 피우지 않고 지냈답니다. 평생 만성두통과 혈행장애(血行障碍)를 지녔던 그에게는 가혹한 것이었지만, 자신이 다른 노동자들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지내는 것은 더 참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베이유는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노동세계에 직접 뛰어들고 싶었습니다. 결국 학교에서 1년간 휴가를 얻어내어 전기공장에 들어가고, 다시 자동차 공장에서 금속 절단공으로 일하게 됩니다. 여기서 경험한 내용은 그녀의 유명한 <노동일기>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공장에서 억압의 실체를 몸으로 깨닫게 되는데, 노동자의 삶은 ‘노예’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이미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음을 발견합니다. 언젠가는 병원 치료를 받고 버스에 오르면서 “도대체 나 같은 노예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이 버스를 타고 내가 가진 12수우를 쓸 수 있는가?” 하고 묻기까지 합니다. 공감능력이 뛰어났던 베이유는 짧은 시간에 완전한 노동자로 살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를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겼는지 “이제 나도 추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서, 좋든 나쁘든 간에 선의와 악의를 두루 갖춘 현실 속의 사람들 가운데 섞여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공장에서 파업을 경험하면서 노동의 참상(慘狀)뿐 아니라 희망도 발견합니다. 그때 쓴 일기는 이렇습니다.

“그녀들은 문을 지키는 노동자가 웃으면서 공장에 들어가게 한다고 즐거워했다. 또 미소와 정겨운 인사말에 대해서도 즐거워했다. 기계에 달라붙어 일할 때면 그토록 고독감이 느껴지던 바로 그 공장에서 그녀들은 우애를 느낄 것이다! 기계에 매여 꼼짝 못하던 작업장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그룹을 조직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새참도 먹을 수 있는 즐거움. 자기 몸을 굽히게 하는 냉혹한 궁핍의 상징인 기계의 견딜 수 없는 소음 대신에 샹송과 웃음소리를 듣는 즐거움. 노동자들은 이제 그토록 오랫동안 생존수단을 제공하던 기계 사이를 편안한 마음으로 누빌 수 있는 것이다.

기계는 더 이상 손가락을 자르지 않으며 고통을 주지 않는다. 아무 말 없는 기계 속에서 인간생활의 리듬에 따를 뿐 타임-레코더의 리듬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기쁨. 물론 며칠 후면 다시 가혹한 생활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그런 것에 걱정하지 않으며 마치 전쟁 중의 휴가병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육중한 기계에 대해 침묵이나 속박, 복종과는 다른 추억을 갖게 될 것이다. 자부심을 갖게 되고, 모든 금속에 대해 약간의 인간적 온기를 남겨주는 그러한 추억말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이렇게 공장이 즐거운 곳, 육체가 노동으로 피로하더라도 영혼이 기쁨을 맛보고 기쁨을 양식으로 삼는 그런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없이 계속 사랑한다는 것

베이유는 이처럼 깊은 고난 속에서 ‘사랑의 운명’에 대해 숙고했습니다. 자청한 고난이든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통이든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력(重力)처럼 우리를 불행으로 끌어들이는 ‘고난에 대항하기’보다는, ‘고난을 은총의 도구로 이용하기’를 권합니다. 그는 부활한 그리스도마저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음을 기억해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겪는 고난에 대해 “왜 고난인가?”라고 묻지만 하느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불행으로 인해 산산조각이 난 채 쉼없이 절규하지만 이 영혼에게 주어지는 것은 허무뿐입니다. 베이유는 이 허무를 ‘영혼 전체에 넘쳐흐르는 공포’라고 말합니다. 이 허무는 ‘하느님 없음’이며, 곧 ‘사랑 없음’입니다. 그러나 더 두려운 일은 고통 속에서 우리가 사랑하기를 그칠 때 “하느님의 없음이 결정적인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허무 속에서 들어가 사랑하거나 적어도 사랑하려고 계속 노력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이 그 영혼에게 다가와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베이유는 말합니다.

우리는 신세한탄을 하면서 십자가(자신의 고난)를 진흙탕에 던져버릴 수도 있고, 그리스도처럼 그 십자가를 통해 희망을 건져내려고 ‘허무 속으로’ 투신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영혼의 어둔 밤에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베이유는 “불의와 파괴와 무의미한 고난을 본다. 나는 정의와 장차 이루어질 해방과 십자가의 밤에 일어나는 사랑을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 역시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자 출신이었으며, 하느님은 ‘출애굽 사건’에서 보듯이 한결같이 노예들의 해방을 위해 역사에 개입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때 가장 큰 변혁의 무기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이사 42,3) 불행한 인생들에 대한 연민이며, 슬픔을 통해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긍정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Simone Weil a Joë Bousquet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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