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실시간뉴스
편집 : 2024-04-26 11:11 (금)

본문영역

제목

작아지는 만큼이나 커지시는 분/주님 공현 대축일 후 토요일

닉네임
늘벗
등록일
2020-01-11 06:50:42
조회수
1390
첨부파일
 3.jpg (470995 Byte)

영성 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직면하는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이냐?’, ‘나냐?’ 하는 물음에서의 선택일 게다. 매사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으려는 집착에만 빠진 지금의 나 때문에, 우리는 내 안에서 예수님을 아예 멀리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에 온통 못된 나만 자리 잡게 만들기도 한다. 마음 밑바닥에서 예수님과 경쟁을 해서 내가 이기고자 애쓴다. 이러다보니 믿음의 삶을 산다지만, 어떤 때는 그 도가 너무나 지나쳐 결국은 허무한 영적인 패자가 되기 일쑤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이처럼 분명히 밝힌다. 그는 때와 분별력을 갖춘 단지 그분보다 먼저 이었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리 때문에 ‘어정쩡한 삶’을 사는지? ‘저긴 내가 가야 할 자리지, 나에게 꼭 어울리는 자리지.’라며 착각하곤 한다. 하여간 모르긴 몰라도 남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나.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그분과의 관계를 외쳤고, 그곳은 꼭 자신이 머물 자리가 아니라고 믿었다.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푹 숙인다. 실력 있는 이도 누구나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일 게다. 물론 실력 있다고 다 숙이는 건 아니리라.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다니는 시건방진 이들도 더러는 있더이다. 실력과 함께 ‘겸손을 가진 이’만이 자신을 요한처럼 낮출 줄 안다. 그런 이는 어디에 있든지 간에 반드시 표가 난다. 내면이 바깥에 드러나기에. 익은 벼가 숙이는 건 간단하다. 알이 찼기에. 하지만 설익은 벼는 숙이고 싶어도 못 숙인다. 알이 여물지 않았기에.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학식이 높고 명성이 자자하더라도 숙일 줄 모른다면, 설익은 벼와 하등 다를 바가 없으리라.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정체를 말해주는 가장 함축된 말일 게다. 떠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자신의 역할이 끝남을 알았으리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루카 7,28).’라고 그를 칭찬하셨다. 지금껏 어느 누가 감히 예수님께 이러한 말씀을 들을 지?

사실 인간적 면에서는 어쩜 두 분은 당대에 지극히 대립적 관계일 수도. 잉태 배경이나 탄생 시기로 보아 또래이시며 친척이셨고, 두 분 다 여러 제자를 가까이에 불러 가르침을 주셨기에. 어쩌면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며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훨씬 더 멋진 구도자처럼 보이기도 했을 게다. 더구나 망나니들과 함께 다니신 예수님보다 요한이 어쩌면 더 존경을 받았을 수도.

그럼에도 요한은 진작 자신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가리켜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라고 광야에서 외쳤다. 요한은 그렇게 그릇이 큰 겸손한 이었다. 우리도 이렇게 조금만 스스로를 낮추면 큰 그릇으로 비칠 수 있는데, 종종 이를 외면해 난감을 겪기도. 내 아니면 결코 안 된다면서 겸손을 저버려, 주어진 은총마저 잃곤 한다. 자리에 연연하다 추한 꼴 보이기도. 신앙생활 할 만큼 한 이마저 이런 처신으로 만신창이 수모도 더러 받았었다.

이렇게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친교를 기뻐하였다. 내 것만이 옳고, 네 것은 그르다는 생각에 서로가 하나 되는 것을 강력 거부하는 현 세태에, 요한이 보여 준 겸손으로 남을 위한 배려로 바뀌어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작아지는 만큼 커진다는 진리를 기필코 터득하자. 이처럼 점점 더 작아질 때에, 예수님은 더욱 더 커지실 게다.

작성일:2020-01-11 06:50:42 183.104.33.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