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12]

교회는 연중시기를 보내고 있다. 주일미사 때, 우리는 루카 복음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루카 복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가 않다. 복음의 말씀이 지나치게 부와 가난(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대립, 대조시키며 평가에 대한 선택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예수님의 출생 배경과 유년 시기를 다룬다.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압권은 ‘마리아’다. 그 마리아가 부른 노래는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1,51-53)

아기를 가진 여인이 부른 노래치고는 너무하다. 오늘날 집안 어른들이 들었다면 “그딴 소리 하는 것 아니다” 했을 것이다. 물론 통치자와 부유한 사람이 들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천만다행이다. 통신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또 어떤가? 바로 이사야서 61,1-2를 인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루카 4,17-19)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부자와 라자로’, 하인리히 3세의 에히터나흐 필사본(1030년경). 루카 복음서 16장 19-31절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아무리 (좁은 의미의) 영적 · 종교적 메시지를 찾으려 해도 비켜갈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당대의 보통 유대인들이 그렇게 철학적이며 영적이며 종교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가난하고 배고프며 식민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겪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천만다행이다.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이 들었다면 사회 불만세력을 선동한다고 엄하게 다스릴 테니까. 물론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의 ‘천만다행’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식민지 동족을 아끼고 사랑하여 헌신하려는 이들에게도 당신 뜻을 분명히 전한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7,22). 마리아의 노래도, 예수님의 말씀도 아무리 우리가 구원과 해방은 이 세상 것이 아니라도 해도,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그것을 배제한, 혹은 그 고통과 억압을 간단히 초월한 구원이 아님을 보여준다.

앞에서 루카 복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그 이유로 복음이 지나치게 이분법적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했다”(루카 6,24-26).

예수님께서 어찌 그렇게 사람을 편 갈라서 한편은 행복하다 하고, 다른 한편은 불행하다고 하실까? 앞에서 인용한 마리아, 자애로우신 어머니 마리아가 어찌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 “통치자” “부유한 자”를 그렇게 철저하게 배제할까?

루카 복음 앞에서 우리는 그 불편함을 모면하기 위해 타협을 시도한다. 바로 영적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 말이다.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지 않는 사람쯤으로, 통치자는 하느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쯤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쯤으로, 굶주리는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리는 사람쯤으로, 감옥에 갇힌 사람은 자기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쯤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쯤으로 말이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결코 예수님과 마리아가 꾸짖으려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이라고 위로를 삼을 수 있으므로…….

그러는 사이에, 그러니까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정말로 배고프고, 정말로 잡혀가고, 정말로 앞을 못보고, 정말로 묶여 갇혀 있고, 정말로 비천한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아져버렸다. 통치자들은 그 교만이 끝이 없고, 부유한 사람들은 그 부를 주체하지 못하는데, 영적 해방 덕분에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우리가 부와 가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동안 실제 부와 가난 사이의 불균형은 도를 넘어서고 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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