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 산문집 <너에게 가고 싶다>를 읽고

▲ 내 가난이 아름다운 것은 내 영혼을 가장 순정한 얼굴로 되돌리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너에게 가고 싶다 ⓒ한상봉)
요즘은 자주 이웃 동네를 산책한다. 설악산, 금강산, 지리산…… 명산을 트래킹하는 것도 운치 있고, 지리산 둘레길, 제주 올레길, 스페인 산티아고길, 이름난 길을 걸어보는 것도 큰 재미겠지만 형편이 안 닿으면 안 닿는 대로 내가 사는 이웃동네를 걸어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걷는다는 사실, 그 자체에 방점을 찍는다면 어디를 걷느냐는 크게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철거를 앞두고 있는 북아현동 산동네 길을 작정 없이 걸어본다. 어깨 한쪽을 무너뜨리고 있는 비루하기 이를 데 없는 낡은 집들과 ‘작두도령’과 같은 촌스런 이름들을 달고 있는 간판들, 조금이라도 더 녹지를 확보하기 위해 빨간 다라이에 심어놓은 식물들, 축대 돌 사이에 위태롭게 터를 잡고 피어난 풀들에게 하나하나 눈길을 주는 재미도 지리산의 시원해 뵈는 능선을 바라보며 걷는 재미에 못지않다. 그런데 여태껏 왜 내가 이 재미를 몰랐을까. 삶을 실상으로 대하지 않고 이름이나 타이틀로 대하는 내 오랜 버릇이 작용한 탓은 아니었을까.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속세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도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을 모르겠구나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면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세속에서 머니 사는 것도 외지다네

마음이 외지다면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 도연명이 주는 깨달음일 텐데, 내 몸은 현실에 묶여 있으면서도 마음은 늘 지리산이나 한라산을 걷기를 꿈꾸었고, 산티아고 800킬로미터를 언젠가는 반드시 걸어보겠다는 희망사항을 버리지 않았다. 현실은 현실이고 꿈은 꿈이라는 지극히 이분법적 세계에 나는 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면서도 허균의 산문집 <한정록>(閑情錄)을 읽으며 “마음이 외져야 사는 곳이 외지다”라는 글귀에 밑줄을 긋고 좋아라 했으니 머리로도 알고 몸으로도 아는, 온전한 깨달음이란 늘 이렇게 멀고 더디다.

한상봉의 산문집, <너에게로 가고 싶다>는 머물고 떠나는 길의 기록이다. 서울에서 무주로, 경주를 거쳐 다시 서울로, 그의 산문집은 정처(定處)없는 정처(定處)의 기록이고, ‘외진 마음’의 기록이다. 외진 마음이란 무엇일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의 경지, 어디에 있든 자신의 마음과 몸의 주인이 되어 자신이 사는 곳을 오롯한 삶의 터전으로 만드는 경지가 아닐까.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그 길에 내가 주인이 되려는 마음, 적어도 이 산문집의 작가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로 보였다.

▲ <너에게 가고 싶다>, 한상봉, 이파르, 2013
한상봉의 책은 먼저 서울에서 전라도 무주로의 귀농(歸農)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도시의 찌꺼기, 관념의 부스러기들을 털어버리는 세안(洗眼)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는 말한다.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것은, 본 것 때문에 제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걸 보는 바람에 제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내 눈동자 속에 이미 들어와 버린 것들이 내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그는 낡은 목장갑에서 자신과 이웃의 고단한 노동을 본다. 눈으로 보이는 사물에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정신과 기운을 읽는 마음, 그것이 다름 아닌 시심(詩心)이겠다. 그는 시인(詩人)이라는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시를 ‘살아내는’ 시인이다. “흙과 나무와 새들을 상품화시키는 세상에 대적하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영적 혁명밖에 없다”라고 하면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다시 발견해야 함을 역설할 때보다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할 때 그는 더욱 시인답다. 그의 소박하고 따뜻한 감수성이 빛나는 이 아름다운 한 대목을 읽어보자.

무주 산골 살 때였다. 어느 날 산길을 내려오는데, 마을 형님 한 분이 양복 차림에 지게를 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라고 묻자, “밭에······”라고 답한다. 그는 아마 밭에 캐어둔 감자라도 지고 올 모양이다. “1년 내내 양복을 입을 기회가 없더라고······. 생각해보니, 양복 윗도리 양 어깨에 넣은 ‘뿅’ 때문에 이 옷이 지게질에 제 격이란 생각이 들더군.” 남이야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든 말든 장롱에서 몇 해째 묵고 있던 양복이 쓸모를 찾은 것이다. 아, 투박함이 주는 아름다움이여. 이 사랑스런 쓸모 있음이여.

양복을 작업복으로 입을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은 마을 형님이 관념의 사람, 먹물의 사람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고도 “투박함이 주는 아름다움이여. 이 사랑스런 쓸모 있음이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산문집의 작자가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리라.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관습의 피곤한 요구에 아랑곳없이 자유롭게 사람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시인의 시선이라면 그는 분명 시인의 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심은 문학적 훈련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사람과 삶을 낮은 곳에서 살피는 마음, 타인을 피붙이처럼 볼 수 있는 마음, 곧 연민(憐憫)에서 온다고 하겠다. ‘연민’은 그가 과거에 펴낸, 내가 처음으로 읽은 그의 산문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서른이 훨씬 넘어 그의 부부가 딸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의 아내가 “우리 통장 만들어도 될까?”라고 말했을 때,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냥 웃었다는 그의 마음. 연민은 바로 그 마음이리라. 그는 늘 약간의 소유와 사치에 대해서 죄스럽게 생각하는(꼭 그러지 않아도 좋을 텐데) 마음이 약한 사내다. 가녀린 어린 것들을 위하려는 어미의 마음, 그 어미의 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아비의 마음, 또 그 한 가족의 모습을 책을 통해 바라보는 독자들의 소슬한 마음, 이 모든 마음들이 같은 세상을 건너가는 자들의 연민이 아닐지.

▲ 벼가 이룬 숲 위에 집을 짓다. (사진 출처 / 너에게 가고 싶다 ⓒ한상봉)
책의 두 번째 구비에서 그는 예술치료사가 되어 삶의 근거지를 무주에서 다시 경주로 옮긴다. 농부에서 대학 강사로 그는 변신한다. 농가주택에서 아파트로의 공간이동이 그에게 불러일으킨 상념들을 그는 기록한다.

그는 무주에서 ‘경주로 떠나는 것은 새로운 흐름 위에 나 자신을 얹어 놓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가 제주와 진도와 남도의 많은 곳으로 삶의 장소를 옮겨갈 때, 그가 떠난 장소에 정겨운 사람들이 있고, 곡진하고 애틋한 사연이 있는 것도, 그가 그의 삶을 관광객처럼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그네처럼 살았기 때문이리라. 나그네의 삶이란 관계와 인연을 중시하는 삶이 아닐까. 비록 온라인에서 만나더라도 가슴을 열고 그를 내 안으로 영접하는 관계를 만들 줄 아는 마음.

이 글을 쓰는 날 아침에 나는, 비구니들의 일상을 담고 있는,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서>를 아내와 함께 보았다. 영화 속에서 절간에 비가 오는 모습이 왜 그렇게 처연하게 느껴졌는지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그 영화를 보면서 나는 줄곧 과연 도반(道伴)이란 누구일까, 생각해봤다. 속세에 두고 온 그의 사연과 곡절을 이해하는 자, 그의 슬픔과 고독의 깊이를 이해하는 자가 도반이 아닐까.

꾹꾹 울음을 삼키고 있는 처연함의 깊이를 이해하는 자가 도반이라면, 나는 한상봉의 산문집에 담긴 연민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나는 같은 길을 가는 도반으로서 그의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의 책을 읽은 셈이다. 한 줄기 소나기를 맞은 듯,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지만 조금 소슬해지기도 했다. 고마운 일이다.
 

김보일 (배문고등학교 교사,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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