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 - 19]

피라미드 마을에서 역마차를 타고 카이로 시내로 들어와, 신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사다트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마리 기리기스(Mari girgis)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오자, 맞은편에 자리한 고대의 요새가 곧장 시야에 들어왔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집트 초대 성당들이 밀집해 있는 올드 카이로(Old Cairo) 지역은, 부분적으로 다소 훼손되긴 했지만 바빌론 요새(Babylon Fortress)라고 불리는 육중한 성곽에 의해 전체적으로 한 바퀴 빙 둘러싸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바빌론이라는 지명이 어째서 카이로의 구시가에 자리한 옛 성곽의 이름이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일부 고고학적 기록에 따르면,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Cambyses Ⅱ, 기원전 530~521년 재위)의 이집트 원정 당시 포로로 끌려온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이 요새가 건설되었다고 하는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이 세운 요새는, 로마의 트라야누스(Trajanus, 서기 98~117년 재위) 황제에 의해 전통적인 비잔틴 건축 양식으로 신축된다. 붉은색과 흰색 석재를 이용해 요새를 신축한 로마인들은, 이곳에 로마 타워(Rome Tower)라고 하는 거대한 망루를 세웠다. 올드 카이로를 대표하는 상징물인 이 바빌론 요새에서는, 매달 초에 요새 안의 망루를 촛불로 장식하는 행사가 벌어지기 때문에, 일명 촛불의 성(Candles Palac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잠시 전철역과 도로를 연결하는 계단에 멈춰 서서 카이로의 발상지이자 이집트 ‘콥트교도들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올드 카이로 지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히잡으로 머리를 곱게 감싸고 검은 부루카로 전신을 가린 아랍 여인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는 스산한 도로 위로, 어디선가 그 옛날 포로로 붙들려온 바빌로니아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던 구슬픈 노랫소리가 아스라이 울러퍼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바빌론 요새의 높다란 방벽 너머로, 요새의 오른쪽에 자리한 알 무알라카 성당(Al Moallaka Church)의 은빛 십자가 한 쌍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성당 건물이 옛 바빌론 성곽의 남서 두 요새로 통하는 돌출부를 기반으로 하여 건설되었다고 해서 아랍어로 ‘매달리다’라는 뜻을 지닌 ‘무알라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성당은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공중 성당(Hanging Church)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 올드 카이로의 상징, 바빌론 요새 ⓒ수해

바빌론 요새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이탈리아 순례자들과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함께 알 무알라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고대 파라오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신전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유서 깊은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24개의 가파른 계단이 시선을 잡아당겼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상징하기 위해 조성해놓은 이 계단은, 처음 열두 계단은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두 번째 열두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를 의미한다고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열두 계단은 각각 구약과 신약의 통일을 의미한다는 다양한 해석이 깃들어 있었다.

계단의 좌우 난간과 연결된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바라보면서 현관에 올라서자, 정면에 걸린 역대 콥트 교황들의 사진이, 한때 이곳이 이집트 콥트 교단의 총본산이었음을 암묵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었다. 3세기 말에 세워졌으나 9세기에 파괴되었다가 11세기에 복구된 후, 알렉산드리아 교구에 거주하던 콥트 교황이 이곳으로 옮겨와 거주함으로써 명실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이집트 콥트교도들의 정신적 지주로 돈독히 자리매김해 온 이 성당은, 당시 저명한 신학자, 법학자, 천문학자 등이 연구를 위해 빈번히 찾아오던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이집트 콥트교도들의 학문과 신앙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알 무알라카 성당은, 최근 람세스 역 앞에 새로 건립한 성 마르코 성당으로 교황청이 옮겨갔지만,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찾아든 수많은 순례자들의 발길로 붐비고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사촌 바르나바와 함께 사도 바울로의 1차 전도여행에 동행하기도 했던 선교사이자 신약성서의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한 복음사가인 성 마르코는, 서기 64년경에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뒤 약 7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가난한 구두수선공 아니아누스에게 최초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된 마르코의 전도활동은, 흡사 가을 들녘의 마른 풀 위에 붙인 불길처럼 이집트 전역으로 급격히 번져나갔다. 그러자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로 구성된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권력통치의 일환으로 창출해놓은 혼성의 신 세라피스(Serapis)를 기리는 축제가 시작되던 날, 놀라운 속도로 급성장하는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의 교세 확장에 위협을 느낀 알렉산드리아의 종교 기득권층은, 때마침 부활절 예배를 보고 있던 마르코를 붙잡아 그의 목을 밧줄로 꽁꽁 묶은 채 길거리로 끌고 다녔다. 결국 며칠 동안 밧줄에 묶인 채 알렉산드리아 시가지 구석구석으로 끌려 다니던 마르코는 처참한 모습으로 절명(絶命)하고 만다.

▲ 콥트 박물관 전경 ⓒ수해

수많은 이적을 보이며 순교한 마르코의 유해(遺骸)는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현재의 성 마르코 기념성당 동편에 묻혔다가, 828년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 수로를 통해 베네치아로 밀반출된다. 그 후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된 마르코의 유해는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San Marco)에 봉안되었다가, 1968년 콥트교 교황이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시릴 6세(Cyril VI, 1959~1971년 재임)의 요청에 의해 다시 이집트로 반환되었다.

독실한 콥트교도인 이집트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자 콥트교 최초의 주교로 추앙받고 있는 성 마르코의 유해는 이탈리아에서 이집트로 반환되자, 맨 처음 순교 당시의 모습 그대로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채,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의 성 마르코 기념성당 지하 묘지에 각각 따로 봉안되었다고 했다.

다소 장황하게 들리는 이집트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자, 이탈리아에서 온 몇몇 순례자들은 당장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 마르코의 유해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이집트로 반환되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려운 눈치였다.

사소한 견해의 차이는 있었지만, 각자 여과되지 않은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함부로 전이시키는 불상사를 빚는 일은 없을 만큼 냉철한 이성을 소유한 이들이었기에, 묵묵히 목조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알 무알라카 성당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고 나서, 다시 바빌론 요새 왼편에 자리한 콥트 박물관(Coptic Museum)으로 걸음을 옮겼다.

1908년 콥트교 유물 수집에 평생을 바친 마르코스 시마이카 파샤에 의해 이집트 내 콥트 그리스도인들의 예술품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립된 이 박물관 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콥트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대략적인 연대기 순으로 정리되어 있는 전시품들은 고대 왕조와 그레코-로만 문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하면서도 소박한 콥트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박해와 수난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1만 6천여 점의 유물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들이 특히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2층에 전시되어 있는 ‘미라 초상화’로 유명한 카룬호수 주변의 파이윰(Faiyum) 지역에서 출토된 <원죄(原罪)>라는 제목의 성화는 단연코 압권이었다.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못 이겨 금단의 열매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 열매를 따먹은 후 부끄러움으로 나뭇잎으로 앞을 살짝 가린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담은 성화는,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이 시사하고 있는 의미 또한 매우 컸다.

원죄 이외에도 <비너스 탄생>과 <그리스도의 승천> 등을 소재로 한 각종 성화와 함께 콥트어로 쓴 양피지 사본의 성서가 특별히 눈길을 끌었지만,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된 상태라서, 아쉽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 아부 사르가 성당과 유대교 회당으로 내려가는 지하 계단 ⓒ수해

콥트 박물관을 나와 근처의 음식점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나서 다시 알 무알라카 성당의 오른쪽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각종 민예품과 콥트교의 성물을 판매하는 기념품 상점들 사이로 노천 책방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골목길이 나타났다. 어둡고 협소한 골목길을 따라서 한참 걸어가다가 보니, 드디어 성 세르기우스 성당(St. Sergius Church)의 출입문이 나타났다.

303년, 로마의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서기 286~305년 재위) 황제 때 시리아 알라사파에서 순교한 팔레스타인 출신의 로마 군인 세르기우스와 그의 동료 바쿠스를 기념하여 세운 이 성당은, 항간에서는 ‘아기 예수 피난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아랍어로 ‘아부 사르가 성당’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유대왕 헤롯(Herodes, 기원전 37~서기 4년 재위)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 온 아기 예수 가족이 약 3년 가까이 숨어 지냈다고 한다.

좁다란 골목에 건물 입구가 반 지하로 되어 있어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성당처럼 보이지 않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노아의 방주’처럼 생긴 천정 아래로 펼쳐진 내부 면적은 상당한 규모였다. 중앙에 제단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를 상징하는 대리석 기둥이 좌우로 6개씩 두 줄로 서 있는데, 모두 흰 대리석 기둥인데 12 제자 중 은전 30닢에 예수를 판 유다(Judas)를 상징하는 기둥만은 별도로 붉은 대리석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기적, 세례, 부활 장면을 그린 성화로 다채롭게 장식된 본당 내부는, 콥트 박물관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잠시 미사포를 쓰고 조용히 두 손을 모두고 기도드리는 콥트교 신자들 옆에 앉아 묵상을 하고나서, 그 옛날 아기 예수 가족이 숨어 지내던 동굴을 향해 내려가려고 하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된 이후로 동굴 속에 지하수가 다량 유입되는 바람에, 현재는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의 아쉬워하는 마음을 달래주느라 일부러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 이집트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와, 인근에 자리한 유다인 회당 벤 에즈라 시나고그(Ben Ezra Synagogue)로 향했다. 히브리어로 ‘모이다’라는 뜻을 지닌 ‘시나고그’는 주로 회당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서기 4세기에 지어졌고 9세기까지는 ‘미카엘’ 혹은 ‘가브리엘 천사 성당’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모세 기념 성당’이라고 불리는 이 회당은, 처음에는 알 무알라카 성당의 부속 건물이었다. 맨 처음 콥트교도들의 성당으로 사용되던 이 회당은, 이분 툴룬 왕조(서기 868~905) 때 콥트교도들에게 순금 2만 디나르의 세금을 부과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콥트 교황청에서 몇 개의 성당을 부득이하게 매각할 때 유다인들이 매입하여 회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1115년 예루살렘에서 랍비 아브라함 벤 에즈라가 이곳을 방문한 이후에 재건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붙이게 되었고, 당시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까닭에 아라베스크 문양을 하고 있다. 1965년까지 무려 천여 년 동안 이집트 유다인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이 회당은, 지금은 시내 중심지의 샤리아 아들리가에 있는 유다교 회당에서 주로 모이기 때문에,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다소 어둡고 눅눅해 보이는 회당 안으로 들어서자, 맨 먼저 단상에 설치된 대리석 석판 위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띄었다. 이집트 가이드의 번역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했다.

“이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의 랍비 모세가 이곳에서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전 해진다. 이 장소에 대해서 토라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모세가 성에서 나가 야훼를 향하여 손을 펴매 그 손에 응답이 되었더라. 바로 이 장소에서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대리석 석판 외에도 회당 뒤편에 지금도 모세의 우물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 회당은, 19세기 말에 발견된 약 25만 점의 게니자 문서(Genizah Document)로 더욱 유명하다. 게니자는 히브리어로 창고나 보관소를 의미하며 전문적으로는 유다교 회당에 딸린 서고(書庫)를 가리킨다.

회당 안에 비치된 참고자료에 의하면, 이곳의 중요성은 1800년대 중반에 이집트를 방문한 유다인 여행가 자콥 사피르(Jacob Saphir, 1822~1886)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으며, 1892년 유다교 회당 개축공사를 하던 중 이곳에서 대량의 고문서가 발견되었다. 이 고문서는 대부분 870년에서 1880년 사이에 히브리어 문자를 사용한 아랍어로 쓰인 것이어서, 이집트 방언 발달사에 대한 훌륭한 자료 역할도 하고 있다. 또한 문서들은 종교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법률, 행정, 농업 및 이슬람교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의 교역에 대한 기록도 담고 있다. 특히 950년에서 1250년 사이에 기록된 문서는 사회 ·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사적 가치를 담고 있다.

▲ 그리스 정교회 소속, 성 조지 수도원의 공동묘지 ⓒ수해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그리스도 단성설을 주장하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로스 주교가 파면된 이래로 서방 교회와 깨끗이 결별을 고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이슬람 제국 치하에서 무시무시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콥트교도들의 파란 많은 사연을 그대로 대변해주기라도 하는 양, 무겁게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주는 지하 성당 순례를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오자, 둥근 바실리카 양식의 지붕 위로 그리스 국기가 힘차게 펄럭이는 또 하나의 성 세르기우스 성당이 보였다.

현재 아기 예수 가족이 피난했던 동굴 위에 세워진 똑같은 이름의 두 성당 중 지하 건물은 이집트 콥트 교황청 관할이었고, 지상에 세워진 건물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의 성당으로, 드넓은 면적에 같은 이름의 크고 작은 규모의 수도원 건물이 복합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영어로 ‘성 조지 성당’이라 불리는 성당 내부를 순례하고 밖으로 걸어 나오자, 드문드문 자리한 수도원 건물 사이로 드넓은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잠시 더위를 식히느라고 나무그늘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수도원 한쪽에 별도로 조성해 놓은 순교자 성 조지의 흉상과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무덤 위에 세워진 무수한 십자가를 바라보노라니, 문득 미국의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가 그의 명저 <비극을 넘어서(Beyond Tragedy)>에 수록해 놓은 에세이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성서적인 삶의 관점은 그것이 한 면으로는 역사와 인간의 자연적 실존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 면으로는 역사의 중심과 근원과 성취는 역사를 넘어서 있다고 주장하는 관계로 변증법적이다’라는 논지를 담고 있는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은 비극의 자각(自覺)을 통과하여 ‘비극을 넘어서’ 있는 희망과 확신에 이른다는 것이 나의 에세이들의 논지이다. 그리스도교 세계관의 중심에 서 있는 십자가는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함께 인간의 죄를 극복하게 하려는 하느님의 뜻과 전능을 계시하여 준다.

십자가는 인간이 그의 최고의 도덕적, 정신적 성취 속에서(로마법과 유대 종교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위반하였다는 것과, 하느님은 이 악이 가장 극력하게 표출된 바로 그 순간에 악을 그 자신 속에 흡수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은, 인간의 가장 높은 정신적 노력에도 악이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그러나 이 악을 실존(實存)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선하신 하느님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은 비극을 넘어서 있다.”

어쩐지 오늘따라 유난히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라인홀드 니부어의 메시지를 몇 번이나 가슴 속으로 되새겨 보노라니, 서서히 적막한 수도원 공동묘지 위로 눈부신 사하라의 일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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