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 - 18]

이른 아침, 출근길의 누비아 화공과 함께 피라미드 마을로 향했다. 커다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어디론가 분주히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과 물담배를 피우며 한가로이 장기를 두는 노인들의 모습이 빈번하게 눈에 띄는 어느 골목길에 접어들자, 사막 문화의 실상을 고스란히 반영해주는 벽화가 다채롭게 그려진 진흙 담장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연분홍 버건빌리아 꽃향기가 아련히 번져 흐르는 골목길을 걸어가는 동안, 누비아 화공은 틈틈이 밭은 한숨을 내쉬며 지금은 행방조차 알 길 없는 부모,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천상의 강’이라고 이름 불렀던 나일 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아스완은 이집트 최남단에 위치한 까닭에, 그레코-로만 시대가 끝난 5세기 이후에나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늦게 전해진 아스완의 그리스도교는, 엘레판티네 섬의 ‘세인트 시메온 수도원’을 거점으로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7세기에 처음 설립되었다가 10세기경에 재건된 이 수도원은, 누비아인들을 콥트교(이집트의 토착 그리스도교)로 개종(改宗)시킨 선교사들의 은신처였다. 그 때문에 전도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을 그린 프레스코 성화가 지금도 폐허의 사원 구석구석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예로부터 실크로드 카라반(Caravan, 隊商)들의 대표적인 기착지이자 남부 누비아, 수단, 에티오피아의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인 아스완 지역에 살고 있던 누비아인들은, 이슬람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12세기까지는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만큼 돈독한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단과 이집트 국경 사이에 인공호수인 낫세르호가 조성되면서, 이 소박한 신앙공동체의 삶에도 매서운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당시 아부심벨과 아스완 지역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누비아인들은 졸지에 삶의 터전을 빼앗긴 채, 이집트 정부에서 제공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강제이주를 감행해야만 했다. 그러자 고대로부터 아스완에 정착하고 있던 독실한 콥트교도인 누비아 화공의 가족들은, 한사코 이슬람 교도인 베두인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고집하는 그를 홀로 남겨두고,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접경지역으로 단호하게 이주해버렸다. 이를테면 부족으로부터 집단처벌을 받은 셈이다.

▲ 피라미드 마을, 베두인의 집 ⓒ수해

사실 가족과 친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철없는 베두인 아가씨의 손목을 잡고 무작정 야반도주를 결행하긴 했지만, 내심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가 사랑하게 된 베두인 아가씨는 독실한 콥트교도인 누비아 화공과 결혼했지만 전혀 남편의 종교를 따라서 개종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종교를 그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현명한(?) 부부는 지금도 한집에 살되 각자의 신앙생활을 존중하면서 별다른 마찰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슬람교를 국교로 표방하고 있는 이집트 사회에서 콥트 교도인 누비아 화공이 겪는 불이익은 여러모로 심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의 정서에 맞지 않는 종교를 억지로 서로에게 강요하느니, 차라리 문명의 이기가 주는 혜택을 적당히 포기하고 각자 자신이 원하는 신앙생활을 해 나가기로 굳세게 약속했다고 한다.

평상시에는 사카라 인근의 파피루스 공방에서 고대벽화를 모사하는 작업에 전념하다가, 불현듯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쳐 오르면, 주체할 수 없는 가슴을 그러안고 사막과 오아시스 지역을 정처 없이 몇 달씩 떠돌아다녀야만 가까스로 직성이 풀린다고 하는 누비아 화공은, 비록 특별히 가진 것은 없지만 지금의 생활에 매우 만족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가슴 한구석에 은밀히 묻어 두었던 사연을 토로하면서 짐짓 눈시울을 붉히는 누비아 화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후미진 골목길을 걸어가는 동안, 내내 어젯밤 촉수 낮은 전등불이 희미하게 비추는 토담집 안에 들어섰을 때, 성모 마리아상 옆에 꾸란의 성구(聖句)가 나란히 적혀있는 작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각자 자신의 정서에 익숙한 신의 이름을 부르며 나란히 기도를 드리던 그들 부부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와 같으면 옳고, 다르면 무조건 그르다’고 치부해 버리는 이 완고한 세상에서, 상대방의 신앙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지혜로운 삶을 꾸려나가는 누비아 화공 부부의 온화하고 경건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집집 뜨락마다 목마른 길손을 배려하여 소담스런 물항아리가 빠짐없이 놓여있는 골목길을 계속 걸어가다가 보니, 이윽고 마당을 에워 두른 담벼락에 낙타를 몰고 가는 아라비아 상인을 그려놓은 벽화가 인상적인 어느 집 앞에 당도했다.

미리 연락을 받고 마당에 나와 기다리던 누비아 화공의 베두인 친구를 따라서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햇빛을 가리기 위해 마당 한가운데 드리워놓은 허름한 차일 아래로, 집안 곳곳에 사막과 피라미드를 소재로 한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아스완의 누비안 마을과 서부 오아시스 지역의 베르베르인 마을에서도 이미 충분히 느낀 바지만, 이집트 무명화공들의 그림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 폐허의 유적 사이로, 고즈넉이 형체를 드러내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수해
현재 이집트를 대표하는 명소인 기자(Giza)의 피라미드 유적단지는 수도 카이로에서 약 13킬로미터 떨어진 나일 강 서안 사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피라미드가 처음 축조될 무렵의 이곳은, 지금처럼 사막에 철저히 고립된 지형이 아니었다. 최근 몇몇 고고학자들의 치밀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당시 이 주변 경관은 지금과는 달리 초목이 무성한 사바나 지대였다. 그래서 각각의 피라미드는 둑길로 나일 강과 연결되어 있었고, 양쪽 끝에는 죽은 파라오의 부활을 기원하는 장제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척박한 토양을 아랑곳하지 않고 드문드문 수초가 자라고 있는 작은 물웅덩이를 몇 구비나 돌고 돌아서 피라미드를 찾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멀고 험했다. 고대에 나일 강이 범람하는 시기가 되면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채취한 붉은 화강암을 펠루카에 실어날랐다고 하는 사료를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피라미드로 향하는 모래 언덕 주변은 온통 물살이 소용돌이치며 흘러간 흔적으로 난무했다.

낙타를 몰고 앞장서 가는 베두인 친구가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서, 고대의 신전에서 출토된 상형문자가 새겨진 석조유물 파편이 도처에 산재해 있는 드넓은 모래벌판을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걸어나가자, 저 멀리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하늘 아래로 ‘기자의 3대 피라미드’ 가운데 가장 남서쪽에 자리한 멘카우라(Men-kaoura, 기원전 2514~2486년 재위) 왕의 피라미드를 위시하여, 카프라(Khafra, 기원전 2547~2521년 재위) 왕과 쿠푸(Khufu, 기원전 2579~2556년 재위) 왕의 피라미드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스어로 삼각형 모양의 과자를 지칭하는 퓨라미스(Pyramis)에서 그 어원이 유래되었다고 하는 피라미드는, 맨 처음 조성 당시에는 외벽 전체가 새하얀 석회석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햇볕에 반사되면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아름다움을 발산했다고 한다. 그러나 14세기에 이집트를 지배하던 이슬람 군주의 명령에 의하여, 피라미드의 외관을 장식하고 있던 화장석(化粧石)은 대부분 카이로의 이슬람 사원을 지을 때 석재로 사용하기 위해 뜯어갔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카프라 왕의 피라미드 꼭대기에만 그 중의 일부가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 피라미드의 수호신상 스핑크스 ⓒ수해
멘카우라 왕과 카프라 왕의 피라미드 중간지점으로 보이는 곳에는, 영생을 꿈꾸던 고대 파라오들의 무덤 앞에 세워둔 대표적인 수호신상(守護神像)인 거대한 스핑크스(Sphinx)가 놓여 있었다. 사자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는, 맨 처음에는 머리에 왕관을 쓰고 앞이마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코브라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보니 지금은 턱수염이 떨어져 나가고 코 부분도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이집트 역사의 지난한 전개과정을 묵묵히 응시하며 수천 년을 한결같이 피라미드의 충직한 수호신상 역할을 자처해 온 노쇠한 스핑크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아직도 화장석의 일부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카프라 왕의 피라미드 상륜부를 주시하며 계속 왼쪽 방향으로 걸어가자, 어느덧 쿠푸 왕의 피라미드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여행자들의 발길로 정신없이 붐비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향해 걸어가자, 카이로 대학에서 단체로 피라미드 관람을 나온 대학생들이 정다운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학생들의 설명에 의하면, 기자의 세 피라미드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맨 처음 조성 당시에는 높이 146미터에 평균 2.5톤의 화강암 230만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상륜부의 일부가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137미터에 불과한 높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람하고 늠름한 위용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랍 시대(639~1517년)와 오스만 튀르크 통치시대(1517~1798년)를 거쳐 프랑스의 이집트 지배(1798~1801년)시기에 원정을 왔던 나폴레옹은 대단한 수학광이었는데, 그가 학자를 시켜서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이 피라미드를 구성한 돌들을 다시 해체하여 2미터 높이의 30센티미터 두께로 벽을 쌓으면 프랑스 전역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미처 안으로 입장하기도 전에 피라미드 주변에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던 카이로 대학 고고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들려주는 나폴레옹이 집계한 피라미드의 크기에 압도되어 버린 탓인지, 오래 전부터 이집트에 들어가면 인류평화를 기원하면서 오체투지로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한 바퀴 둘러보겠다던 계획은 보기 좋게 무산되어 버렸다.

학생들의 안내로 최근에 건립된 ‘태양의 배 박물관’을 둘러보고, 몇 번이나 엎어지고 나자빠지면서 기자의 세 피라미드를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 가파른 모래 언덕까지 걸어 올라가자, 도저히 더이상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해 버렸다. 그런데도 누비아 화공의 친구는 “기자의 세 피라미드를 한꺼번에 다 둘러보려면 반드시 낙타를 타야만 한다”고 했던 그의 충고를 무시하고, 순전히 즉흥적인 감상에 젖어 드넓은 피라미드 구역을 도보로 걸어 다니다가 지칠대로 지쳐버린 나에게, 자꾸만 쿠푸 왕의 석관이 놓여있는 피라미드 내부 현실(玄室)로 들어가 보기를 권했다. 그러나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동안 피라미드 전망대의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 위에 넙죽 엎드려 카메라 렌즈를 통해 ‘고대인들이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태양광선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해 놓은 피라미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기하학적인 간결함으로 인공건축의 정수(精髓)를 보여주는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천문 · 점성 · 지리 · 수학 · 기하 · 토목 · 건축 ·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과 지혜가 총동원되어서 산출해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놀랍고 신비한 건축물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노라니, 어쩐지 보면 볼수록 거대한 피라미드가 그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한 채의 가련한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 런던, 영국 박물관 이집트 미라 컬렉션 ⓒ수해

부질없이 허망한 인간의 욕망을 집약적으로 상징해 놓은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동안, 문득 언젠가 런던의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에서 보았던 한 구의 미라가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죽음의 마법이라는 주제로,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출토된 수많은 미라와 장례문서들이 진열되어 있는 전시관 안에서 발견한 그 미라는, 파피루스 끈으로 전신을 꽁꽁 동여맨 채 얼굴을 한쪽으로 비스듬히 돌리고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마치 먼 훗날 언젠가, 영혼이 빠져나가고 없는 그의 박제된 육신이 미라가 되어 수많은 군중들의 눈요기로 전락하게 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화가 났는지, 아니면 죽음과 부활을 관장하는 심판관이 기다리는 내세의 길로 안내해주는 신비한 주문에 골똘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인지.

고대에 이집트 현지를 직접 방문했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세계 최고의 석조건축물인 저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약 10만 명의 노예를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부려서 완성해 놓은 작품이라고 했다. 물론 최근에 발표된 학계의 다양한 이견(異見)에 의하면, 피라미드는 노예를 동원하여 강제로 축조한 건축이 아니라 농한기에 일손을 놓고 하릴없이 노닥거리는 농부들의 자발적인 잉여노동에 의해 건설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피라미드 역시 파라오의 무덤이 아니라, 가뭄과 기근(饑饉)을 대비해서 만든 일종의 곡식창고였다는 가설도 등장하고 있다.

누구의 주장이 옳건 그르건 간에, 여하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여행자들이 낙타를 타고 유유자적하게 행보하고 있는 저 거대한 피라미드 속에는, 살아서의 영화를 죽어서도 그대로 누리고자 했던 역대 파라오들의 파렴치한 욕망과 함께, 수많은 노역자들의 눈물과 한숨 어린 희생이 서리서리 깃들어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피라미드와 미라를 통해 영생을 기원하던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의 욕망으로 채색된 내세관을 유추해 보면서, 어느덧 사막과 혼연일체가 되어 버린 듯이 무미건조한 느낌을 주고 있는 피라미드 위로 잠시나마 그늘이 드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1927년 아테네 일간지 특파원 자격으로 이집트를 방문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바로 지금 나와 꼭 같은 지점에서 피라미드를 대면하고 그의 소회를 적어놓은 기행문의 일부가 생각났다.

▲ 구름과 함께 펼쳐지는 피라미드 파노라마 ⓒ수해

“이 나라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몇몇 순간을 제외하고 이집트인이 자유를 이상으로 삼은 적은 결코 없었다. 정치에서는 지도자들에게 복종하고, 예술에서는 기존 규칙을 충실하게 따랐으며, 사상에서는 케케묵은 전통을 따랐다. 이 나라가 수천 년에 걸쳐 간직해 온 위대한 열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죽음과 싸워 이기는 것. 죽은 뒤에도 변함없이 같은 생을 이어 가는 것. 영혼이 자신을 알아보고 다시 깃들 수 있도록 시신을 보존하는 방법을 찾아 내는 것.

이집트인의 집과 궁전은 잠시 머무는 거처이기 때문에 진흙으로 되어 있다. 수천 명의 일꾼들이 불멸의 작업을 돕는 가운데 시신의 내장을 비워 내고 향기로운 약초와 타르로 몸을 채운다. 그 위에 부적을 매달고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를 시신 옆에 둔다. 사후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어떤 액막이 주문을 외워야 하는지를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사자의 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대는 매일 아침 외출한다. 밤이면 다시 무덤으로 돌아온다. 밤에는 그대의 편의를 위해 커다란 초들이 밝혀지고 햇빛이 그대의 육신 위에 다시 빛날 때 까지 꺼지지 않는다. 초들이 그대에게 외칠 것이다. 어서 오세요! 당신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집트를 지배하는 것은 이 같은 불멸에 대한 목마름이다. 이 목마름이 이 나라의 경제와 정치와 사회를 규제한다. 문학과 예술을 종속시킨다. 노예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인내를 제공한다. 사제와 왕들은 이것을 부와 무력의 도구로 이용한다. 이 불멸의 절규를 듣고 나는 온몸을 떨었다. 거친 피라미드들이 문득 돌 천막들처럼 느껴졌다. 죽음의 사막에 진을 치고, 영혼이 죽지 않도록 지키는 불시의 비극적인 섬광 속에 드러난 그것들은, 인간의 미미한 호흡을 영원히 지상에 붙잡아 두려고 필사적으로 싸우는 공상 속의 높다란 요새들이었다.”

다소 시니컬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1927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순수 그리스어로 초판이 나왔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지중해 기행>을 영역(英譯)한 테오도라 바실스의 빼어난 소감을 그대로 빌려본다면 “일인칭 화법으로 쓰인 직선적이고 독창적이고 신선한 이 기록들에는, 예리한 역사의식과 함께 생생한 저자의 느낌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구태여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1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연일 50도를 육박하는 이토록 척박한 토양에서, 태양신 숭배에서 싹튼 재생과 부활과 영생으로 이어지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은, 어쩌면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긴장관계를 통해 전개되는 한정된 ‘인간의 조건’을 극복해 보려는, 지독히도 역설적인 관념의 변증론이 잉태해낸 또 하나의 가련한 정신적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머리 위에서 작열하며 쏟아져 내리는 눈부신 태양을 아랑곳하지 않고, 영생을 꿈꾸던 고대 파라오들이 조성해 놓은 불가사의한 유물을 안타까운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이 상황에서 언어로 꿈꾸는 연금술은 한낱 무용지물일 뿐이라는 자조 섞인 독백을 토로하다가 보니, 오만불손한 자세로 도도히 하늘 한가운데 우뚝 버팅기고 있던 태양을 휙 가리며 한 떨기 탐스러운 뭉게구름이 지나갔다. 그러자 메마른 사막과 무의미하게만 보이던 일체의 구조물들이 삽시간에 놀라운 색채를 띄며, 비로소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빛과 그늘 둘 다 순간과 영원 사이에 놓인 기나긴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우연히 목격하게 되는 눈물겨운 ‘사랑의 춤’이었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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