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

왜 갑자기 그 사람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1973년 9월 11일 쿠데타군의 총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1973년 9월 11일 산티아고

이 날 칠레의 하늘은 잔뜩 찌푸린 을씨년스러운 아침 하늘을 열어보였다. 칠레 시민들은 아침부터 라디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리며 산발적으로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칠레에서는 반란의 공기가 여기저기에서 감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9월 10일밤 칠레 해군과 미국의 전함들은 공동작전을 위해 칠레의 발파라이소에 집결해 있었고, 미국은 오래전부터 선거로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준비해오고 있었다. 9월 11일, 이 날은 신임투표계획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옌데는 4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재신임투표에서도 그의 승리는 거의 틀림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날 아침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칠레의 육, 해, 공군과 경찰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들은 군사혁명위원회(군사평의회)를 만들고 의장에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육군 최고사령관을 선출했다.

아옌데는 7시 30분 19명의 경호원과 함께 모네다궁에 들어갔다. 잠시후 쿠데타군은 칠레의 여러 방송국들을 점령해나가기 시작했고, 살바도르 아엔데 대통령은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 마지막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다.

"이번이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용기를 주고자 했던 나의 목소리도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박해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는 민중의 충실한 마음에 대해 내 생명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의 운명과 그 운명에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승리를 거둘 것이고, 곧 가로수 길들이 다시 개방되어 시민들이 걸어다니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입니다. 나의 희생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 행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 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방송직후 대통령궁은 경찰과 군 병력, 장갑차, 탱크 등에 완전 포위되었고, 피노체트를 포함한 군부에서는 대통령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다. 해외 망명을 승낙할 테니 항복하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옌데 대통령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지만 설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옌데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킬 계획이었다. 9월 11일 10시 40분,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 경호대에게 대통령궁을 떠날 것을 명령했고, 대통령의 두 딸을 포함해 대부분의 여성들이 대통령궁을 빠져나갔다. 정오가 되자 쿠데타군의 공군 전폭기에서 대통령궁으로 폭탄이 투하되었다. 공군 전투기의 폭격 이후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모네다궁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쿠데타군이 모네다궁에 진입하고 얼마후 몇 발의 총성이 들렸다. 모네다궁 공격을 지휘한 쿠데타군의 팔라시오스 장군은 혁명위원회에 짤막한 전문을 보냈다. "임무 완수. 모네다 접수, 대통령 사망." 쿠데타군의 선봉돌격대를 따라 들어간 군사평의회 정보국 전직 요원은 미국의 언론인 토마스 하우저에게 "대통령의 유해는 머리가 갈라지고 뇌 속의 것들이 마루와 벽에 튀겨져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군사평의회는 아옌데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이후 새로운 칠레에서는 단 일주일여의 기간 동안 3만여 명의 시민이 죽었다.

계급을 넘어 복음으로

홍세화 선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서민들은 자신의 계급을 배신했다고. 노동자들이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기업가들의 배를 불리려는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이다. 서민들이 전혀 서민적이지 않은 후보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요즘 말로 풀이하자면 지금 사회구조 안에서는 전혀 성공할 가망성이 낮은 사람들이 ‘성공하는 국민’을 약속한다는 사탕발림에 홀려 재벌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후보의 입심에 놀아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한 때 우리 사회에서는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인사말이 된 적이 있었다. 요즘은 모두 “성공하세요!”라고 인사말을 건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부자”와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일뿐이다. “부자로 성공하자”는 철썩 같은 약속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정말 부자가 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부자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정말 마음으론 부자가 된 것 같다.

오늘 아침에 버스 안에서 어느 후보의 ‘대통령 후보 연설’을 들었다. 경제파탄으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자녀들의 학비마저 매일같이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다시는 한숨 쉬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거듭거듭 약속한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부자 되는 비법은 한가지뿐이다. 열심히 살라는 모법답안과, “나처럼 해봐요, 이렇게”일 것이다. 항시 돈벌이에 부심하여 푼돈부터 목돈까지 바닥부터 닥닥 긁어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색하다는 이야기도 도덕성 운운하는 것도 일단 접어두어야 가능하고, 탈이 나면 돈으로 때우면 된다. 나 하나 잘되기 위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자원으로 활용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돈이 있고 힘이 생기면 나머지 부족한 것은 머리 좋고 경력 있는 추종자들이 다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통령 될 꿈도 꾸어볼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 후보는 자신의 계급성을 버리고 가난한 서민대중의 편에 서겠다고 감히 장담한다. 집만 빼고 자기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과연 복음적 투신의 살아있는 증인 같다. 그동안 자신이 입신출세하는 동안 보여주었던 그 모든 허물을 덮고 일단 투표장에 가기까지는 지금의 내 모습만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좀더 일찍 회심하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기야 지금이라도 회개한다면 그도 다행한 일이다. 물론 자신이 잘못했다고 제대로 반성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나는 자신의 계급성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고 싶지 않다. 노동자이든 대통령이든 마찬가지다. 자기의 계급성에 매달릴 때 복음은 실종된다. 계급성이란 때로 동물적 감성에 의존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통령이 자신의 계급성에 충실할 때 우리 사회엔 미래가 없다.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조차 자신의 계급성에 결코 충실하지 않았다. 상류계급 출신의 아옌데는 자신의 계급을 떠나 인민대중을 선택하였다. 다만 오늘날의 성공주의 대통령 후보와 다른 점은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 계급을 떠났다는 것이다. 죽기까지 인간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인민대중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민대중의 삶에 철저히 투신했기에 그 고결함이 대중을 감복시켰다. 우리는 사람을 선거 때에 보여준 모습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마지막에 보여준 인간성에 따라서 판단한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마음이 끌리고, 복음이 명령하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이 아니라 복음이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내가 해준 것이 곧 자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예수님 그분이 말씀하셨다. 나자렛 회당에서 그분에게 주님의 영이 내리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과 형제를 맺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 앞에서 할 말이 없다. 아옌데 대통령은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처럼 가톨릭신앙을 고백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 이상을 따라서 순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문제는 겉으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하는 양 국밥집을 드나들며 홍보하지만, 수천만원대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부인과 결국엔 자기들 상류계급의 이익에 충실할 사람들이 민족 지도자로 나선다는 점이다. 그 얄팍함에 한 번 놀라고, 그런 양상이 자꾸 눈에 밟히니 눈앞이 혼미해 진다. 그래, 그리하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데, 만사는 끝까지 가보아야 하겠지. 그 인생의 끝에서 다시 보자 생각한다. 아마 별 볼 일 없겠다, 생각하고 있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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