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선교 일기]

2013년 5월 29일 프놈뻰 기독교연합봉사관에서 열렸던 캄보디아 개신교 90주년 선교포럼에 참석해 ‘캄보디아 가톨릭 선교가 캄보디아 기독교에 준 공헌과 영향’이라는 발제에 논평했던 글을 편지글 형식으로 요약했다.

이 목사님께.

거기 캄보디아 동부 꼼뽕짬의 시골 마을은 어떤가요? 5월 말이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엊그제 왕이 직접 소를 몰고 시농식을 거행했으니 농부들도 이제 소를 몰아 쟁기로 논을 갈아엎고 물을 대 못자리를 준비하겠네요. 사모님도 잘 계시고 아이들도 잘 크지요?

저는 지난 5월 29일에 프놈뻰 기독교연합봉사관에서 열린 개신교의 캄보디아 선교 90주년 기념 포럼에 참석했어요. 150명 남짓 되는 선교사들이 모인 순수 개신교 모임인데 그 중에 한 꼭지가 ‘캄보디아 가톨릭 선교가 캄보디아 기독교에 준 공헌과 영향’이지요. 주최 측에서 논평으로 가톨릭 신부를 한 명 보내달라고 주교님들에게 요청을 했나봐요. 주교님들은 포럼에 참석하는 대다수의 선교사들이 한국 목사들이고, 제가 프놈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니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하시고 저를 보내셨어요.

발제를 하신 K 선교사는 불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캄보디아의 종교적 상황에서 지난 450여 년의 가톨릭 선교가 캄보디아 땅에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확립했고, 토착화를 위해 애썼다고 치하하면서도 혼합주의, 즉 가톨릭이 현지 문화 · 종교와 뒤섞여 정체성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어요. 하지만 가톨릭 선교 입장은 시대에 따라 많이 바뀌었고,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토착화와 정체성은 더이상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한국말로 ‘선교’라고 번역하는 ‘미션’은 원래 중세까지는 성부 · 성자 · 성령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었는데, 16세기 중반에 예수회가 설립되고 예수회원을 세상의 여러 곳으로 파견하며 이를 ‘미션’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 후 개신교 · 가톨릭 모두, ‘미션’은 되도록 많은 현지인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이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선교’는 현지의 문화 · 종교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요. 선교사가 오기 전에 하느님이 이미 계셨기에, 현지인에게 세례를 주기 전에, 먼저 겸손하게 선교사가 현지 문화와 종교 안에서 세례를 받아야지요.

K 선교사가 지적한 대로 캄보디아에서 가톨릭의 선교에는 과오가 있고 반성하고 있어요. 지난 450년이 넘는 선교 역사에서 식민 제국의 힘과 영적 엘리트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 영적 · 지적 우월감으로 선교를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인정해요. 서양 열강들이 문호개방을 강요하며 들어올 때 그리스도교도 들어왔고, 그래서 프랑스 종교 혹은 베트남 종교로 인식됐어요. 이런 면에서 보면 ‘폴폿의 공산 정권 동안 캄보디아 내에서 모든 종교의 말살’,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운 선교관 시작’,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현대에 접어들어 캄보디아 내에서 새로운 선교를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도 있지요.

저는 발제에서 ‘간접 선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게 무슨 말인가 했어요. 가톨릭에서는 장애인 재활이나, 교육, 농촌 개발, 의료봉사 등의 활동을 단순한 간접 선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사회 정의 실현으로 보거든요. 현지인들에게 호감을 주고 신자 수를 늘이기 위한 간접적인 수단으로 사회봉사활동을 하지는 않아요. 교회가 약자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고,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모습을 캄보디아 사람들이 보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느낄 수 있어야 참된 선교지요.

▲ 몬돌끼리 닥담 성당, 2009년 ⓒ김태진

저는 충분한 신앙 교육과 성찰의 시간을 가진 후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캄보디아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자신들의 신앙을 고유하게 표현할 수 있기를 바라요. 지금까지 외국 선교사에 의해 새로 지어지는 많은 가톨릭 성당들이 캄보디아 건축 양식을 도입하고, 성당 내부에 창세기, 그리고 예수의 탄생, 공생활, 수난, 십자가, 부활 등을 벽화로 그리기도 했어요. 꼼뽕짬 주교좌 성당의 캄보디아식 예수상은 부처님이나 힌두교 신상처럼 보인다고 입방아에 많이 오르기도 하고요.

이런 가톨릭의 토착화 노력을 K 선교사는 긍정적으로 언급했지만 저는 미완의 토착화라고 봐요. 외국 선교사들이 토착화라고 생각해서 서양의 가톨릭 문화를 캄보디아식으로 변형해서 캄보디아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캄보디아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들이 마음으로 만난 예수를, 그들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주체적인 신앙의 표현 단계에 이르러야 진정한 토착화라 할 수 있지요. 예상했듯이 제 논평이 끝나자 바로 질문이 있었어요. 어디까지가 토착화이고, 어디까지가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인지, 성령의 역사하심과 토착화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되는지 등등.

질문하신 목사님은 개신교에서는 혼합주의의 위험 때문에 더이상 토착화라는 말은 안 쓰고 대신 ‘상황화’라는 말을 쓴다고 설명 하시더군요. 사실 토착화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히 선교사들 사이에서는 오래된 질문이고 숙제이지요. 이 목사님도 ‘웰랑 뜨레이’(김태일 감독의 2012년작 다큐멘터리)를 보셔서 아시다시피 캄보디아 동북부 산악 소수부족인 프농족들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을 무서워하잖아요. 외부에서 유입된 그리스도교와 현지 토속 종교, 문화와의 충돌이 빚어내는 아픔들을 보면 토착화가 말처럼 쉽지 않아요.

K 선교사는 과거 가톨릭의 선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가톨릭과 개신교가 어떻게 협력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보려면 현재를 보아야지요. 가톨릭과 개신교의 협력의 시작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공동번역성서예요. 이 목사님이 자랑스럽게 여기듯, 첫 크마애 성경은 개신교 성서공회가 1954년 간행한 <순 크마애 성경>이지요. 가톨릭 측에서는 그때는 물론 최근까지 가톨릭 전용 성경이 없었어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라틴어가 아니라 자국어로 미사 전례를 봉헌할 수 있게 되자 1965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아 이 개신교용 <순 크마애 성경>을 전례에 사용했지요.

그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번역이 진행되었으나 내전으로 개신교측 성서번역위원들이 모두 사망하여 중간에 무산되었어요. 정치 상황이 안정되고 1984년 크마애 성서공회가 재결성되어 공동번역이 재개되었고 마침내 1997년 공동번역 신구약 합본 <풀어쓴 크마애 성경>이 출판되었어요. 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번역 사업은 성경으로 끝나지 않고 교리 관련 서적을 함께 번역하기도 해서 앞으로도 많은 그리스도교 서적들을 함께 번역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어요.

이 목사님도 참석해서 잘 알듯이 꼼뽕짬에서는 그리스도교 열 개 교파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모여요. 이 모임은 1997년 한 프랑스 부부가 꼼뽕짬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죠. 남편인 쟝 뽈 베르나다는 개신교이고, 부인인 존비에브 베르나다는 가톨릭이지요. 서로의 종파에 대한 이해와 존중, 관심을, 부부 안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까지 넓혔어요. 성탄, 부활 등에 함께 모이고, 공동 명의로 묘지를 구입하기도 했어요. 가끔 세미나를 열어, 장례 예절이나, 지도력, 청년 등 여러 가지 주제로 함께 공부도 해요.

애석한 점은 1997년 이래로 이 모임에 참가해 왔던 꼼뽕짬 교구의 제랄드 보긴 신부가 2010년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이 교회 일치 운동에 가톨릭이 더이상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에요. 사실 프놈뻰에서도 몇 년 전까지 매년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 모임을 성 요셉 성당에서 주최했으나 주임신부가 바뀌고 나서 더이상 열리지 않아요.

거창하게 교회 일치 운동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청년들은 더 쉽게 잘 만날 수 있지요. 저는 어떠한 형태든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 만나야 일치된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1975년 폴폿 정권이 외국인들을 몰아내 선교사들이 캄보디아를 떠나자, 이때 크마애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함께 뭉쳤어요. 개신교의 청년들은 가톨릭의 미사에 참례했고, 반대로 가톨릭의 청년들은 개신교의 예배에 참례했지요. 종파적 차이보다는 외국인들이 떠나고 나서 혼란 속에 남겨진 크마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뭉쳐야 한다는 마음의 일치가 더 크게 작용했지요.

운동을 통해서도 청년들이 만나요. 저도 한때 가서 청년사목을 도와주었던 캄보디아 가톨릭 학생 센터(CCSC)는 예수회 애쉴리 에반스 신부(Fr. Ashley Evans)가 설립했고 오랫동안 담당해왔지요. 이 센터의 남학생들 중심으로 축구팀이 있었는데 2005~2006년에 우연한 기회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구성한 캄보디아 청년들과 정기적으로 축구 경기를 하는 기회를 가졌어요. 운동을 통해 청년 양성을 하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보고 온 애쉴리 신부는 개신교 목사님들이 사회의 언저리에 있던 소외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들에게 운동을 통해서 윤리적 가치를 몸에 배게 한다며 높이 평가했어요. 운동경기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욕구나 충동 대신 규범을 따르고, 폭력으로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대신 상대를 존중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협력으로 원하는 바를 달성하는 법을 가르쳤대요.

기도 모임도 좋은 방법이에요. 지금 한 달에 한 번 프놈뻰 기독교연합봉사관에서 외국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종파에 상관없이 모여 떼제 기도를 하고 있어요. 이미 캄보디아 가톨릭 지역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 떼제 기도가 활성화되어 있어요. 캄보디아 개신교 젊은이들도 캄보디아 가톨릭 청년들과 함께 떼제 기도 모임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목사님,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고 아픈 역사적 상처 때문에 가난과 질병, 불의에 시달리는 캄보디아 땅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우리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먼저 가톨릭이니 개신교니 따지지 않고, 서로 협력해서 진정한 토착화을 위해 노력해요. 그리고 캄보디아에 있던 기존의 종교들, 불교, 이슬람과도 대화를 하고 협력하고요. 그래야 함께 사회 정의를 위해 투신할 수 있지요. 그것이 하느님 나라 건설이잖아요. 개신교도 그 안에 여러 교파가 있지만 모두 마음을 모아 종교간의 대화를 위한 통합기구를 마련하여 가톨릭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과 협력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목사님, 편지가 길어졌어요. 언제 프놈뻰에 올라오시면 꼭 미리 전화주세요. 곡차라도 한 잔 하며 이 목사님의 시골 교회 선교 무용담을 듣고 싶어요. 안녕히 계세요.
 

김태진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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