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파노라마-17]

드넓게 펼쳐진 나일 강 서안의 농경지대와 사막지대의 경계선상에 자리한 고대 유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누비아 화공의 귀여운 아이들은 재차 물었다.
“그래서, 그 다음, 그 다음은 뭐라고 말했을까요?”
“글쎄,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정말 잘 모르시겠어요? 사막이 아름다운 건 음, 음.....”
“글쎄, 그건 아마도 피라미드와 낙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 텍쥐베리의 아랍어 번역본 <어린왕자>를 펼쳐들고 황사가 뿌옇게 휘날리는 사막을 걸어가는 동안 누비아 화공의 아이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질문을 건넸다. 내가 어린왕자를 이미 수도 없이 읽었다고 얘기하면 실망할까봐, 계속 모른척하고 딴전을 피우자 아이들은 이윽고 나를 대추야자 나무가 우거진 마을 외곽지대의 어느 공동우물 앞까지 강제로 떠밀고 갔다. 그리고는 낡은 두레박을 우물 속으로 휙 집어던지더니 샘물을 한바가지 떠서 건넸다. 아이들이 두레박에서 건져 올린 한 바가지의 샘물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시원했다.

“오우! 그래, 사막이 아름다운 건 바로 이 아윤(Ayun) 때문이란 말이지?”
여태까지 계속 딴전만 피우던 내가 느닷없이 아랍어로 우물을 의미하는 ‘아윤’을 들먹이자, 아이들은 갑자기 환호성을 터트리며 기뻐했다. 오지를 여행할 때 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아주 낯선 공간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토속 언어를 한마디 구사하면서 느끼게 되는 친화감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주입된 문화의 차이(다름)에서 오는 ‘심리적 거리’를 단숨에 극복하게 해 주는 기묘한 마력을 발산한다.

▲ 사카라, 고대 유적지로 향하는 언덕. ⓒ수해

우물에서 길어 올린 샘물과 밭에서 갓 따온 수박과 참외로 목을 축이고 난 우리는 천천히 각종 청경채가 싱싱하게 자라나는 농경지를 지나서, 이집트 최대의 네크로폴리스 지역으로 알려진 사카라의 모래 언덕을 향해 힘겹게 걸어 올라갔다. 아름드리 대추야자나무 몇 그루가 수문장(守門將)처럼 늠름한 자세로 입구를 지키고 있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자, 아담한 규모의 매표소가 나타났다.

매표소의 창구 앞에는 이미 수많은 여행자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얼른 대열에 합류하여 티켓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누비아 화공의 귀여운 꼬마들이 잠시 기다려보라는 표정으로 은밀한 윙크를 살짝 건네더니, 매표소 직원에게 다가가 유창한 언변으로 뭐라고 한참 설명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설명을 다 듣고 난 매표소 직원은 밖으로 나오더니, 나를 발끝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몇 번이나 요리조리 뜯어보고 나서는, 이윽고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카이로 시내에서 고등교육까지 받은 누비아 화공의 처남이 방금 아이들이 한 말을 통역해 주었다.
“우리 아빠는 현재 사카라의 파피루스 전시관에서 고대 벽화를 모사하는 화공이며, 이분은 우리 집에 온 손님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손님을 모시고 왔는데, 손님에게 티켓을 끊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 티켓을 끊어야만 한다면 우리가 대신 돈을 내겠다.”

그동안 실크로드를 따라서 먼 길을 달려오는 동안 누차 경험한 일이지만, ‘손님’이라는 말에 이토록 적극적인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랍인들의 낯선 길손에 대한 환대는 실로 대단했다.

누비아 화공네 꼬마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매표소 직원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여행자들의 기다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오더니,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오! 앗살람 알레이쿰~”
‘그대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랍전통식 인사를 나누며 한바탕 요란한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자, 매표소 직원은 마치 나를 자기가 초대한 손님이라도 되기라도 하는 것 마냥 요란한 몸짓으로 환대했다.

그는 우리 일행을 대추야자나무 아래 놓인 작은 나무탁자에 잠시 앉아있으라고 하더니, 고소한 에이쉬 빵과 향이 진한 민트 차를 하염없이 권했다. 그러면서 드넓은 유적지를 한꺼번에 다 돌아보려면 다리가 몹시 아플테니까, 그가 아침저녁 출퇴근할 때 이용하는 낙타를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저녁때 퇴근하기 전까지만 돌아오면 된다고 하면서 한사코 낙타를 빌려주겠다고 제안하는 매표소 직원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광범위하게 분포된 피라미드 유적을 일방적으로 한 바퀴 휙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고 천천히 폐허의 유적과 유적 사이를 걸어 다니다가, 마음속에 그리던 이미지를 찰라적으로 획득해내야만 하기에, 정중하게 사절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조세르 왕의 계단 피라미드와 세드 신전. ⓒ수해

한걸음 내딛을 적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게 만드는 모래더미를 밀치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저 멀리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피라미드와 세드 신전(Sed Temple)이 시야에 들어왔다. 얇은 종이 한 장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한 화강암으로 정교하게 쌓아올린 신전 안으로 들어서자, 높이 6.6m의 거대한 석조 파피루스 기둥 20여개가 좌우로 나란히 도열해 있는 긴 회랑이 나타났다.

회랑을 지나자, 고대에 ‘왕위 갱신제’라고 불리던 세드 축제(Sed Festival)가 열리던 드넓은 마당이 나타났다. 기록에 의하면, 나일 강의 범람이 끝나고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의 첫 달에 열리는 이 축제는 파라오가 즉위하고 30년째 되는 해에 처음 시작되며, 그 후로는 매번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열렸다.

파라오가 자신의 성공적인 통치를 신에게 인정받는 동시에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공개석상이기도 한 이 세드 축제에서, 파라오는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고 한다.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경계를 나타내는 두 개의 반월형 표적 사이를 오가며 분주히 달리기를 하던 고대 파라오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마당을 벗어나자, 한창 보수중인 제 3왕조 조세르 왕(jozer, 기원전 2670~2650년 재위)의 피라미드가 나타났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시원(始原)으로 알려진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Step Pyramid)는 높이 63m에 여섯 개의 계단이 달려있다. 죽은 파라오의 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해 놓은 이 계단 피라미드의 두드러진 특징은, 피라미드가 단일 건물이 아니라 벽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장제전과 신전을 비롯한 다양한 부속 건물들이 붙어있는 일종의 ‘피라미드 콤플렉스(Complex, 복합체)’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1920년대 중반 영국의 고고학자 후스와 키벨에 의해 발굴된 조세르 왕의 계단 피라미드는, 메소포타미아 출신이라고 전해지는 재상 임호테프가 설계에서 건설까지 맡아서 완공한 작품이다. 그는 이집트인들이 접대용으로 즐겨 사용하는 의자인 마스타바(Mastaba)의 구조를 확대하여, 정육면체 블록들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계단 피라미드 구조를 완성하였다. 건축가이자 외과의사로 알려진 임호텝은 열주(列柱)를 건축에 이용한 최초의 인물로, 후에 ‘학문과 의술의 신’으로 신격화 된다.

▲ 오시리스 여신의 형상을 하고 있는 태양신의 후예들. ⓒ수해

지극히 재래적인 방법으로 피라미드 보수작업을 하고 있던 인부들과 손수레를 끌고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사방을 한 바퀴 휘둘러보니, 계단 피라미드의 남동쪽에 심하게 훼손된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어느 피라미드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때마침 확성기를 손에 들고 캐나다에서 온 여행자들을 안내하고 있는 이집트 가이드의 설명에 슬쩍 귀를 기울여보니,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저 허물어진 피라미드가 바로 고왕국 제5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우나스(Unas, 2375~2345년 재위)의 피라미드라고 했다. 계단 피라미드를 만들고 약 300년 후에 만든 우나스 왕의 피라미드 안벽에는, 이집트 최초의 장제문서(葬祭文書)에 수록된 내용이 녹색의 상형문자로 세세하게 새겨져 있다.

일명 ‘피라미드 텍스트’로 알려진 이 장제문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를 무덤에 안치할 때 죽은 자의 재생과 부활과 영생을 기원하면서 신관(神官)이 불렀던 주문을 모아놓은 일종의 주술서이다. 피라미드 텍스트와 함께, 우나스 왕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자신의 피라미드와 녹색 경작지대 끝에 있는 계곡의 장례사원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해놓은 도로에는, 그의 통치기간 중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흥미로운 부조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왕의 신전을 짓기 위해 아스완 채석장에서 채취한 화강암을 펠루카에 실어 나르는 장면과 아시아인들을 실은 대규모의 선박을 통해 당시에 이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과도 무역을 했음을 알리는 장면을 비롯하여, 북동부 국경 지대에 사는 베두인족을 습격한 사건의 기록인 것으로 보이는 부조가 촘촘하게 새겨진 우나스 왕의 피라미드와 그 주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영생을 기원하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종교관을 나름대로 유추해보노라니, 마른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누비아 화공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 다슈르, 노을 속의 피라미드 실루엣.ⓒ수해

하루 종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피라미드 주변의 모래언덕에 올라가 미끄럼을 타거나 폐허의 신전 사이에 숨어 숨바꼭질 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또다시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군데군데 형체가 마모된 고대의 신상(神像) 앞에 멈춰 서서, 각종 신상들의 형상을 흉내 내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자, 걸음마를 겨우 떼기 시작하면서부터 나일 강 서안의 드넓은 공동묘지를 요람 삼아 자라온 아이들은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신전관리인’이나 ‘낙타를 타고 피라미드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빠가 믿는 콥트교나 엄마가 믿는 이슬람교나 모두가 선한 길로 안내하는 종교라서 두 가지 다 열심히 믿고 따르겠다’고 말하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영혼을 지닌 사카라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장밋빛 노을이 쏟아져 내리는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가 보니, 저 멀리 황사가 뿌옇게 흩날리는 다슈르(Dahshur)의 사막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제4왕조 초대 파라오 스네푸르(Snefru, 기원전 2613~2589년 재위)왕이 만든 ‘굴절 피라미드’와 ‘붉은 피라미드’의 희미한 자취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황량한 모래언덕에 턱을 괴고 앉아, 마치 파블로 피카소의 청색시대 작품 속에 등장하는 ‘늙은 기타리스트’처럼 고독에 사무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피라미드 실루엣을 묵묵히 응시하노라니, 태양신을 닮은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경쾌하게 울러 퍼지면서 아득한 신화의 세계와 적막한 역사의 공간이 하나로 길게 연결되고 있었다.  

 

 
 

수해

기행문학가. 운문사 강원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명상사원과 문화유적지를 순례하다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산 두고 가는 산>과 동아시아 기행 에세이 <예정된 우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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