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8]

물은 흘러야 합니다. 고이면 썩게 마련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이를 빗대어서 세상사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세상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으기만 하면 부패합니다. 사람도 썩고 사회도 썩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당연한 말이 아니라 웃기는 소리, 터무니없는 소리, 혹은 철없는 소리, 심지어는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자기 위안의 넋두리라고 생각합니다. 물은 고이면 썩지만, 재물은 모이면 축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게다가 그럴듯한 설명, 어쩌면 ‘그럴듯한’ 정도에 머물지 않고,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강력한 근거를 갖고 있으며, 그 이론이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재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정당화합니다.

자유주의(여기서 ‘자유’는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곧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같은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 좀 더 정확히 하면 정치와 사회의 규제 및 통제로부터의 경제 혹은 시장 영역의 무한 자유를 의미합니다.)가 어떻고, 자본주의가 어떻고, 수정자본주의가 어떻고(여기서 ‘자본’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그 내용은 노동, 곧 사람과 대척점에 서 있는 자본을 말합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신자유주의’가 어떻고, 마침내는 자본주의 4.0이니, 따뜻한 자본주의가 어떠니 합니다. 그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 곧 인간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느냐에 따라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철학이 함께 형성됩니다. 철학에서는 이를 간단히 인간관과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인간관과 세계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필자가 철학자가 아니므로 잘못을 범하고 있다면 독자의 올바른 지적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들 사상가들 혹은 경제 이론가들은 주로 인간의 본성에서 ‘소유의 욕망’에 주목합니다. 이타심보다 이기심이 더 강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이기적 본성에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기심의 경계, 혹은 소유의 욕망의 경계가 없는데다가, 그에 반해서 소유의 대상 곧 세상의 재화는 제한되어 있거나 그 팽창에 한계가 있으니,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이 소유에 대한 경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이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이에는 앞선 사람과 뒤쳐진 사람이 있게 마련이며, 그것이 세상이라고 합니다. 물론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며, 그래서 도와줘야 한다고 하지만, 그 도움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의 게으름이나 도덕적 해이(무임승차) 때문에 뒤쳐진 경우는 이 도움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사람 사는 세상은 지난 2~300년 동안 이 같은 인간관과 세계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펼쳐진 경제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결과로 세상은 제한된 재화를 놓고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싸움터로 변질되고, 그 싸움터에서 승리는 고사하고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지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럴듯한 말로 우리의 그 딱한 처지가 마치 당연한 숙명인 양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쩌면 그 끔찍함의 정도가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사람됨을 이야기해야할 교육 분야도 ‘경쟁력’이란 그럴듯한 구호로 그 본질이 실종되었고, 이를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사람의 생명을 놓고 심혈을 기울여도 모자랄 의료분야도 어느덧 ‘산업’으로 치부되고, 사람의 건강과 생명은 이윤과 손실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더 나아가 미래 인류의 생존의 필수조건인 자연환경은 착취와 탐욕의 대상이 된지 오랩니다. 발전을 내세웠지만, 그 배경에는 ‘소유’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숨어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연스럽고(?) 혹은 익숙한 이 인간관과 세계관,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 모든 당연한(?) 현상에 우리가 당혹스럽고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부조리한 현상에 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그렇게 치열하게 서로 싸워서 마침내 그 끝에 도달하면, 경쟁에서 승리하든 낙오하든, 우리에게 행복이 다가오고, 혹은 이 세상이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곧 개인적으로는 죽는 그 순간까지 살아남기 위해 한 순간도 평화로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우리 사는 이 사회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곧 참된 인간화와 참된 사회화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두려움의 근원인 비인간화와 비사회화와 맞서 싸우기보다는 도피함으로써 일시적 위로를 찾으려는지도 모릅니다.

용산 개발과 화마로 인한 참사, 쌍용자동차 매각과 노동자들의 연이은 죽음,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과 밀양의 노인들의 처참한 저항, 강정의 해군기지의 건설강행과 마을의 파괴,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많이 곳에서 사람을 고통으로 내모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배경에는 소유에의 욕망과 탐욕의 무절제함이 있으며, 그 무절제한 탐욕이 어느 정도로 무자비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양심과 지성과 상식은 묻습니다. 세상이 꼭 그 같은 싸움터여만 하는가? 우리 사는 이 땅이 공생과 공존, 상생과 협동의 터전이 되면 안 되는 것인가? 사람은 꼭 남을 꺾어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인가?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평화롭게 돕고 배려하며 살 수는 없는 존재인가? 사람의 이타심은 이기심보다 앞설 수는 없을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사랑과 돌봄(Homo homini homo, 사람은 사람에게 사람이다)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Homo homini lupus,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다)을 압도하는 세상은 없는 것일까?분명히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길이 실재합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 사는 모습과 다른 그 길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멜키세덱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독차지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한 것이 아니라, 갖고 있는 것을 남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창세기 14.18-20 참조) 현명한 태도일까요? 어리석은 태도일까요?

또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제자들에게 주시면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당신과 제자들도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으면서, 그래도 자기들만 배부르게 먹을 궁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려 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습니다.(루카 9,11-17 참조) 현명한 태도일가요? 어리석은 태도일까요? 그리고 2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의 삶이 곧 나눔과 희생이었으며, 그 희생과 나눔으로 참된 삶을 얻게 되었다고 코린토 교우들을 가르칩니다.(1코린토 11,23-26 참조) 더 많이 갖는 것, 그리고 더 많이 채우는 것,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 아니라, 더 많이 주는 것, 더 많이 비우는 것, 더 많이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참 삶의 길임을, 인간이 참된 본성임을, 그리고 함께 사는 길임을 교회는 믿고 가르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다양한 형태의 재산 소유권을 행사하는 주체에게는 더 나은 생활 조건, 안정된 미래, 무수한 선택의 기회와 같은 일련의 객관적인 이득이 주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재화는 유혹을 야기하는 기만적인 약속만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재산의 역할을 지나치게 절대시하는 민족이나 사회는 결국 가장 가혹한 예속화를 겪기 마련이다. 실제로, 개인과 제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 소유란 없다. 분별없이 자기가 가진 재화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은 그 재화에 예속되고 그 노예가 되어 버린다. 이 재화가 창조주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동선을 위하여 이 재화를 사용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물질 재화는 개인과 민족을 성장시키는 유용한 도구로서 올바로 기능할 수 있다.”(<간추린 사회교리> 181항, ‘재화의 보편적 목적과 사유재산’)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사회나 그 삶은 선택이며 책임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겠다며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만들고, 그곳에 내 몸과 마음을, 그리고 이 사회를 내던질 것인지, 덜어내고, 나누고, 양보함으로써 공생공영의 공동체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그 선택과 책임은 궁극적으로 나의 몫이며 우리 사회의 몫입니다. 그리고 물론 세상에 대한 책임,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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