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주의 교회에서 영성 구출하기-너는 누구냐④

최근에 어느 잡지사로부터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아직 출간도 되지 않은 책을 교정본으로 읽고 글을 썼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주일 동안 틈틈이 교정지를 보는 동안, 그 모든 길이 자비의 길임을 알았다. 생면부지의 김기석 목사란 분을 처음으로 책을 통해 읽고 음미하였다. 하나의 지평이 또 열리는 느낌이었다.

이 책에선, 마커스 보그란 신학자의 말을 빌어 예수의 삶을 ‘자비의 정치학’이라는 용어로 설명하였다. 이것은 당대의 교권세력이 주장하던 ‘거룩함의 정치학’과 구별되는 것이라 한다. 한 시대에 권력과 언어를 장악했던 사두가이파 제사장들과 바리사이파 지식인들에게 대항한 분이 예수님이다. 그들은 세상을 정결과 부정, 순결과 더러움, 거룩함과 속됨, 유다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한편이 상대편을 장악하도록 허락하였다. 한편은 거룩함의 영역에 속하고 다른 한편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진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거룩한 이들은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당당하고, 잔치에서 상좌(上座)에 앉을만 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받을 만하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의기양양하게 시장통을 휘젓고 다닐 만 했던 것이다. 사방에서 손 한번 잡아 보자고 난리를 벌여야 합당하고, 인기가 하늘을 찔러야 사리에 맞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들의 강점은 단 한가지였다. 율법체제에서 우선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부모를 잘 만나서 사제가 되거나 율법학자가 되거나 더럽게 허드렛일을 안 해도 살만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목한 것은 이러한 율법체제에서 주변으로 떠밀려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리였으며 창녀였으며 병자들이었으며 가난하고 제 힘으로 벌어먹어야 하는 죄인들이었다. 그분의 제자들이 그러한 사람들이었고, 그분이 설교한 대상도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나자렛 회당에서 처음으로 설교하실 때, 성경에선 그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였는지 읽어보면 그분이 어떤 분인지 분명해진다. 그분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부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은 이 부분을 그냥 읽으신 게 아니라, 구태여 ‘찾아서’ 읽으신 것이다. 아마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숯불 같은 마음이 그분의 손가락을 움직여 그 구절을 읽게 하신 것이리라. 이 사람들을 위해 신명을 바치고 싶다. 내 존재가 바로 이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땅의 사람들, 가난하고 괄시받고 이승에서 어쩔수 없이 불행한 생애를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인간적 표현이다. 그분의 음성은 아마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억으로 떨렸을 것이다. 그의 낯빛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갈망으로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또박또박 읽어내려갔을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에 눈물이 고이고, 잠시 호흡이 멎고 손끝에 진동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그 손으로 ‘죄인’들의 몸을 만지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말하였을 것이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우는 사람들아, 너희가 곧 웃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백성들을 미루어두고 시리아 사람 이방인만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까지 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거룩하다, 말한 것을 제쳐두고 세상이 더럽다, 말한 이들의 손을 잡아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다. 절친한 동무가 아니라 낯선 불청객을 집으로 맞이하려는 사람이 곧 하느님의 사람임을 몸으로 말씀으로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영적 혁명이었고, 세상의 기존질서에 금을 가게 만드는 사건이 되었다. 예수님이 보기에는, 자비가 세상을 새롭게 하는 힘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부활 후에도 이승을 떠나기 전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내 양들을 잘 돌보라” 명하셨고, 하느님 사랑이 곧 이웃사랑임을 분명히 하시고, 심판받을 때에 네 사랑의 크기만을 물으실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바오로 사도가 올바르게 이해하였듯이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소용이 없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자비(慈悲)란 사랑할 자(慈), 상대의 마음이 되어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며, 슬플 비(悲), 그를 위해 애태우는 마음이다. 그러니 사람을 애타게 사랑하는 마음을 얻지 않고서야 어찌 하느님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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