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연대 100차 수요모임에서 강우일 주교 강연

인권연대가 창립 14주년과 수요대화모임 100차를 기념해 강우일 주교(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제주교구장)에게서 평화로 가는 길에 관해 강연을 들었다.

22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핍박받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아프더라도 깨달음을 주는 죽비를 내리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는 종교인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면서, 강우일 주교를 “종교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책임 있는 지도자로서 묵묵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자신의 역할도 다 해주고 있는 분”이라고 소개했다.

▲ 강우일 주교는 “노예제를 뒤흔든 것은 로마의 작은 식민지, 유대라는 곳에서 온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다”며 “인류 역사에서 축적된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게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인가를 역으로 드러내는 계기를 만든다”고 말했다. ⓒ문양효숙 기자

이날 강우일 주교는 전쟁과 학살 등 지난 수 세기 동안 전세계에서 벌어진 인류의 비극을 되짚으면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로마의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콜로세움은 본래 크기의 3분의 1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어마어마한 위엄을 자랑한다. 식민지에서 착취한 경제력과 노동력으로 유지되던 이 거대한 건축물은 노예제가 무너지면서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노예제를 뒤흔든 것은 로마의 작은 식민지, 유대라는 곳에서 온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겪은 고통을 통해 인간의 고귀함이 드러날 것이다”

강 주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모두가 형제 자매’라는 가르침 안에 귀족과 노예가 함께 모인 곳이었으며, “노예도 하느님의 자녀이며 고귀한 권리를 지닌 존재라 선포함으로 노예제를 근본부터 뒤흔들었다”고 설명했다. 강 주교는 “많은 이들이 오랜 세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던 것이 축적되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만났던 것”이라며 “인류 역사에서 축적된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게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인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귀한 존재인가를 역으로 드러내는 계기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에 관한 또 다른 예로 강 주교는 미국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언급했다. 홀로코스트 뮤지엄은 유대인들이 아닌 미국 연방정부가 만든 국립박물관이다. 강 주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 후손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 주교는 홀로코스트 뮤지엄에서 제주 4.3을 떠올렸다.

“규모와 양상은 다르지만 인간을 집단으로, 그것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는 점, 인종청소에 가까운 대규모 학살이었으며 국가가 조직적으로 가담했다는 점, 그리고 다른 지역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는 이들은 침묵을 지켰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와 4.3은 다를바가 없다.”

강 주교는 제주 4.3 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며 “제주도 전체 인구 28만 명 중 3만 명이 학살당한 4.3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반드시 치유해야 할 상처”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에 관한 지난 60년간의 침묵은 “해방 이후 정권이 4.3을 단순히 무장폭도가 일으킨 폭동으로 단순화시켜 보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바다 건너 먼 땅의 이야기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강 주교는 “4.3이 생명의 존귀함을 역설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다”며 “과거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인간”이라고 말했다.

“4.3은 공권력이라 해도 사람의 생명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아무리 거창한 이유를 내세워도 국민의 생명이 국가에 우선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기본 인권을 짓밟는 정부나 국가는 결코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어서 그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강 주교는 “제주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국가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군홧발로 들어와 해군기지를 건설한다”며 “이는 3만 명의 무고한 죽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교회라도 나서지 않으면 제주도의 약한 소리가 어디에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며 “국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보전된,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강정을 짓밟고 있다”고 말했다.

▲ 인권연대 창립 14주년 기념 수요대화모임에서 강우일 주교가 강연하고 있다. ⓒ문양효숙 기자

한반도 평화 위한 외침 더 많아져야
힘 과시하는 방법으로 선한 일 이룰 수 없어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강 주교는 50년 전,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가 반포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1962년 10월, 구(舊)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추진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전쟁 도발로 간주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요한 23세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인류는 전쟁으로 엄청난 고통을 치렀는데 또 새로운 전쟁을 치르려 하는가? 두 강대국은 부디 조율을 하라”는 강력한 호소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낸 후 일주일이 지나 소련은 미사일 기지 추진을 중단했고 미국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강 주교는 “교종 요한 23세는 이 경험으로 세계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꼈고, 전 인류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문건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강 주교는 “2013년 한반도는 평화를 위해 좀 더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있다”며 “힘을 과시하고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법으로는 선한 일이 이뤄질 수 없다. 많은 분들이 평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강연이 끝난 후 참가자들이 강우일 주교와 묻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참가자 한 명이 “주교라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바꿔가는 게 쉽지 않은 일 아닌가” 묻자, 강 주교는 “결국 예수님이 방향을 잡게 하신다”고 답했다.

“처음 이런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할 때 망설였다. 결국 내가 믿는 하느님, 그리고 예수님이 사신 삶의 중요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예수님은 공중에 떠 계신, 추상적인 위인이 아니다. 가장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셔서 대단한 사람이라는 게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을 정도로 ‘보통 사람’으로 사셨다. 그것이 내게는 방향이고 믿음의 뿌리다. 그런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내가 사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고 사방의 신음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강 주교는 “비록 한계는 크지만, 내 귀가 닿는 데까지, 내 눈이 닿는 데까지 뭐라도 해야 예수님의 제자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걷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을 대학생이라고 밝힌 참가자는 “청년들이 기성세대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심하다 보니 제주 4.3사건, 해군기지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여긴다. 그런데 이런 청년들이 이끄는 미래 사회가 과연 진보할 수 있을까 두렵다”면서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하는가” 물었다. 이에 강 주교는 ‘을의 분노’를 언급하며 ‘연대’를 강조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모든 이들의 삶의 현장이다. 이런 세상에서 청년들도 자기 삶의 모순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때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다른 이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힘을 합치면 세상의 바퀴를 굴릴 수 있다. 혼자서는 안 된다.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

끝으로 강 주교는 “속도가 느릴지언정 역사는 전진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하나의 사고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영원불변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제주도만 해도 처음 해군기지 문제를 거론했을 때는 도민의 상당수가 ‘국가에서 하는 건데 뭘 할 수 있겠냐’고 했지만 지금은 여론이 많이 바뀌었다. 인간의 생명과 가치가 존엄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다만 자기 형제 · 자매의 울타리를 어디까지 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세상은 반드시 더 좋아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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