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한수진]

지난 주말, 감사하게도 부처님이 금요일에 오신 덕분에 황금연휴를 즐기다 느지막한 오후 동네 산책을 나섰다. 발길이 가는대로 큰길과 골목길을 번갈아 걷다보니 커다란 집들이 줄지어 있는 평창동 길에 들어섰다. 길을 걷는 사람은 나와 내 친구뿐.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는 고급 주택가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보던 어마어마한 집은 담장이 높아 고개를 들어도 집이 보이지 않았다. 의외로 담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아담한 집들도 있었는데, 이국적인 건물 모양새를 봐서는 돈 꽤나 들였겠다 싶었다.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한적한 골목길을 걷는 재미가 좋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왠지 소주 한 잔이 고팠다. 저녁에 콩나물밥을 지어 달래양념장에 쓱쓱 비벼먹으려고 쌀을 불려놓고 나왔는데도 이유 없는 사치를 부리고 싶었다. 차가운 소주에 오뎅을 씹으며 친구가 물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부모님이 부자였겠지, 뭐.”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이 내 사촌도 아닌데 나는 배가 아팠다.

따지고 보면 나도 운 좋게 열심히 사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큰 고생 없이 자랄 수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이 재산이었던 아빠와 악착같이 절약해서 번듯한 집을 마련한 엄마 덕에 배고픈 것 모르고, 배울 만큼 배우고, 스무 살 넘도록 용돈까지 받아가며 컸다. 그러나 집 밖 세상에는 어딜 가나 나보다 더 잘 입고 잘 먹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보면서 남의 것에 배 아파하는 법을 배웠다.

▲ 돈 주고 사온 장난감은 마다하고 마트에서 얻어온 빈 상자에 만족할 줄 아는 고양이의 마음을 닮고 싶다. ⓒ한수진 기자

집에 돌아와 소파에 드러누워 신문을 펴니 교황 프란치스코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교황이 세상을 향해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비정한 삶이 펼쳐지고 있다”(한겨레 5월 18일)고 개탄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나도 이 기사를 썼어야 했는데. 명색이 가톨릭 언론 기자가 부처님오신날을 즐기다 기사거리를 놓쳤구나. 탄식도 잠시, 이번엔 명치가 아팠다. 내가 놓친 기사를 남이 써서가 아니라, 교황 프란치스코의 개탄이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팍 꽂힌 것이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바티칸에 새로 임명된 4개국 대사들을 맞이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인한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빈부격차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전 교황들도 각국 대사를 새로 맞을 때마다 산적해있는 국제 문제 중 하나를 택해 그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해왔다고 하는데, 교황 프란치스코는 ‘경제’ 카드를 꺼낸 것이었다. 그는 추기경 시절에도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죄악이라 표현하며 주목해왔다. 그런 면에서 교황의 말은 여느 지도자들이 늘어놓는 그럴듯한 말과 다르게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사회 불평등이 “시장의 절대적인 자치와 금융 투기를 옹호함으로써 공동선을 제공할 책임이 있는 국가의 통제권을 부정하는 이념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옛날 사람들이 숭배하던 황금송아지가 요즘 세상에서는 “돈과 경제에 의한 독재”로 자연스레 변화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추종에는 “인간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고 그 정체 또한 불분명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자본주의’와 ‘불평등’을 건드리며 큰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아주 작은 내 마음을 가득 채운 욕망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나무란 ‘인간성이 결여된 불평등한 사회구조’는 권력과 재산을 가진 자들만이 만들고 지켜온 게 아니었다. 이 구조를 이끌었든 끌려갔든 황금송아지를 쫓느라 자신을 잃어버린 모두의 합작품이었다. 1%의 권력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99%가 그들에게 세뇌되었다거나 힘이 없어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건 나의 욕망을 감추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두 배로 불은 쌀을 냉장고에 넣으며 다음 주일이 오기 전에 고해성사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송아지 앞에서 허해진 마음을 달래보려던 만 오천 원의 사치는 지난 한 주 내가 행한 가장 어리석은 일이었다.


한수진
(비비안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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