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흙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최효정 씨

지난해 12월,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주관으로 내성천 생태답사를 떠났을 때였다. 누군가 눈 덮인 모래밭에 신발을 벗어 두고 바지를 걷어 올리더니 냇가에 발을 담갔다. 온몸을 웅크리게 만들만큼 추운 한겨울 날씨였다. 그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내성천을 천천히 걸으며 조용히 말했다. “모래가 부드럽네.”

최효정 씨는 땅을 좋아한다. 걷는 것도,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아한다. 하루에 두세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걷는다고 했다. 처음 효정 씨를 만난 건 두물머리였다. 그는 두물머리에서 벗들과 농사를 짓고 농민들과 노래를 불렀다. 최근에는 아예 나서서 영양으로 가는 농활대를 모집하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절대 생길 수 없던 일들이잖아요.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난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소극적인 사람이었거든요.”

▲ 영양 농활에서 최효정 씨가 고추 모종을 심고 있다. (사진 제공 / 초록주의)

아버지와 함께한 천주교 농부학교

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들의 시작은 천주교 농부학교였다. 몸이 약해 땅 가까이 살고 싶어 하셨던 효정 씨 어머니가 먼저 농부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두 번, 농부학교가 있는 날을 기다리셨다. 사람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뒤풀이도 하고 즐거워 하셨다.

평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다음 기수 농부학교가 열리자 어머니는 아버지를 종용하셨다. 농사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어머니는 “효정이가 하면 같이 하겠냐?” 물었고, 딸이 하지 않을 거라 예상한 아버지는 그러마고 답했다. 부녀는 함께 천주교 농부학교 7기 수강생이 되었다.

효정 씨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농부학교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농사와 환경이라는 비슷한 관심사 때문이었는지 낯을 가리는 효정 씨도 금세 사람들과 친해졌다. 날이 풀리기 시작한 어느날, 실습수업을 하러 두물머리에 갔다. 감자를 심는 날이었다. 효정 씨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2012년 초였는데, 두물머리 이야기를 듣고 혼자 갔었죠. 산책길에서 미사 터를 못 찾겠는 거예요. 물어보면 되는데 그걸 못했어요. 뭐랄까, 소극적이어서요. 결국 미사도 못 드리고 몇 시간 혼자 헤매다 왔어요. 한겨울이라 무지 추웠죠. 그런데 기분은 좋았어요. 내가 드디어 이런 현장에 왔구나 싶기도 하고, 두물머리가 아름답기도 했고요. 혼자서 ‘이런 곳에 유원지는 말도 안 돼!’ 생각했어요.”

‘받아들여짐’을 경험하며 ‘받아주는 사람’이 되다

사실 그는 다른 ‘현장’에도 그렇게 혼자 간 적이 몇 번 있다.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고, 가고 싶고, 항상 그랬는데 막상 가면 사람들 사이에 끼지를 못 하겠는 거예요. 그 사람들도 모르는 얼굴이 지나가나 보다 하고, 저도 무슨 조직이나 팀으로 간 게 아니라 그냥 혼자 갔으니까 쑥스럽고. 그래서 가면 주변 한 바퀴 돌고 판매하는 게 있으면 뭐 하나 사는 정도였죠. 대한문 가서도 분향소 못 들어가고 서명만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 같아요.”

그랬던 효정 씨에게 전환점은 ‘김병인과 처자들’이었다. 두물머리 농민 김병인 씨와 노래를 좋아하는 몇 명이 만든 노래 팀이다. 노래를 부르며 놀던 어느 여름 밤, 김병인 씨가 ‘처자들’을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그때만 해도 친한 이들이 옆에 없으면 말도 잘 못하던 효정 씨였지만 냉큼 하겠다고 말했다.

▲ ‘김병인과 처자들’. 뒷줄 맨 오른쪽이 최효정 씨 (사진 제공 / 록빠)

“‘김병인과 처자들’에 함께하면서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경험했는데 그게 굉장히 컸어요. 한번 경험하니까 그 뒤로는 반대 입장이 됐죠. 받아주는 입장. 그러니까 요샌 어딜 가도 잘 비비고 들어가고, 먼저 인사하고, 저 멀리서 쭈뼛쭈뼛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말 걸고 그래요.”

작년 8월 두물머리가 행정대집행을 앞두고 있을 때, 효정 씨는 열심히 뛰어다녔다. 일주일에 4~5일을 두물머리에서 지내고 서울에 있는 날에는 광화문 일인시위를 도왔다. 조계사에 있는 두물머리 수레를 일인시위를 하는 사람 옆에 가져다 놓고, 끝나면 다시 조계사에 가져다 놨다.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기도 했다.

약속한 사람이 나오지 않은 날은 대신 일인시위를 하면서 시민들에게 말을 건네고 사진도 찍었다. 조계사에 있는 내성천 지킴이들과 한여름에 차를 마시며 서로의 처지를 나누다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내일모레 여든인 아버지는 효정 씨가 두물머리에서 지낼 텐트를 사 주기도 하고, 두물머리 합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화를 걸어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 모든 ‘특별한 경험’들을 가능하게 해준 두물머리를, 효정 씨는 ‘다른 나로 살게 해준 곳’이라 했다.

하루 전 소식 듣고 합창단 오디션 보던 날
“내게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효정씨는 ‘김병인과 처자들’뿐 아니라 바로크 합창단인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과 서울대교구 합창단 ‘수아비스’의 단원이기도 하다. 지난 2일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은 성공회 서울성당에서 ‘북독일학파의 교회음악’이라는 정기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효정 씨는 대부분 전공자로 구성된 이 합창단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 못했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 그냥 연주나 들으러 다니자 생각했어요. 그런데 노래를 들을수록 너무너무 하고 싶은 거예요. 하루 전에 오디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달려갔죠.”

오디션에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소극적이라더니 적극적이시네요”라고 했더니 “나한테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라고 답한다.

“지금 그걸 해야 좀 더 나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었어요. 안 하면 여기 그냥 주저앉아 머물러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하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필요했어요.”

그는 모태신앙이다. 그의 어머니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외가는 역사가 오래된 천주교 신자 가족이다. 그에게 신앙은 공기 같은 것이었다. 공기 안에서 숨 쉬고 있는 이에게 공기는 무엇이냐는 우문(愚問)을 던졌다.

“음, 신앙을 안 가져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게 나예요.”

하지만 신앙을 가진 것이 특별히 더 고맙고 행복할 때가 있다. 바로 ‘현장’에 갈 때다.

“밀양에도, 강정에도, 대한문에도, 평택에도, 용산에도……. 늘 신부님, 수녀님들이 계시잖아요. 신자들도 열심이고. 천주교 신자인 게 자랑스럽고 뿌듯하죠.”

동물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효정 씨. 사료를 가지고 다니며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나눠주곤 한다는 그는 아프리카에 뼈를 묻는 게 꿈이다. ⓒ문양효숙 기자

아프리카에서 삶을 마치고 싶다

효정 씨는 동물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

“‘키워지는’ 동물이 아니라 야생동물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고양이과를 좋아해요. 뭐랄까. 쳐다보게 만든다고나 할까요. ‘얘가 지금 뭘 하고 있지?’ 하고 찾게 만들어요. 게다가 평상시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와서 머리를 쓱 기대고 자고 있으면, 아! 너무 좋아요.”

사료를 가지고 다니며 동네 길고양이들에게 나눠주곤 한다는 효정 씨는 아프리카에 뼈를 묻는 게 꿈이다. 아직은 막연하지만 삶의 마지막은 꼭 아프리카였으면 한다.

정중동(靜中動). 효정 씨를 볼 때 떠오르는 단어다. 스스로는 소심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는 마음이 말을 건넬 때, 망설임 없이 그 소리에 응답해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낯선 이들과 낯선 공간에 있는 게 쑥스럽다 했지만 어디에 있든 자연스럽고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지치지 않고 해나간다. 언젠가는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있는 효정 씨를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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