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영화 ‘비념’ 임흥순 감독

<비념>은 여러모로 피곤한 영화다. 우선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거의 없다. 이번 주에도 서울에 있는 극장 두 곳에서 하루 1~2회 상영을 하고는 있지만, 평일 낮 시간에 몰려있는 상영시간을 맞춰 극장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제주 4.3 항쟁과 강정마을 해군기지건설을 잇는 영화의 주제는 안 그래도 복잡한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한다. 그럼에도 의지를 갖고 스크린 앞에 앉으면 몇 겹의 피로감이 또다시 몰려온다. 세찬 바람을 맞고 선 감귤나무, 밤길 도로에 나타난 개구리와 들판을 뛰노는 노루 떼 같은 ‘풍경’을 오랜 시간 응시하는 영상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인터뷰 중심의 다큐멘터리 영화였다면 그저 말을 듣는 것에만 집중해도 됐겠지만, 눈앞의 개구리와 노루 떼를 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이해해야할지 자꾸 머리를 굴려야한다. 그래도 여러 지인들이 이 영화를 꼭 보라고 추천했다. 쉽고 빠름이 우선인 시대에 누가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피곤한 영화를 만들어놨을까. 노동절을 하루 앞두고 경복궁 옆 서촌에서 영화 <비념>을 만든 임흥순 감독을 만났다.

▲ 임흥순 감독은 영화를 촬영하며 눈 내린 한라산에 올라 맨발로 눈밭을 뛰어보기도 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두려움에 떨며 산으로 뛰어 도망쳤던 사람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눈밭을 뛰는 ‘퍼포먼스’는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애도의 표현이었다. 개인이 하는 작은 규모의 굿을 뜻하는 제주 말인 ‘비념’을 영화 제목으로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한수진 기자

“사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기가 힘들었어요. 워낙 오랫동안 그 사건을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오신 터라 할머니의 침묵이 더 크게 와 닿기도 했고요. 그런데 4.3 항쟁을 겪은 사람들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돌아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직접 그분들을 만날 수가 없으니 그분들의 혼령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되는 동물과 나무를 통해서라도 대신 전하고 싶었죠.”

임 감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못 박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은 줄거리가 관객들에게 다소 불친절하게 다가올지라도, 임 감독은 사건을 일일이 설명하기보다 자신이 사건을 이해하고 당사자들과 소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욱이 4.3 항쟁의 끝을 1954년 한라산이 다시 개방된 시점으로 본다고 해도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지속된 비극을 2시간이 안 되는 영화에 모두 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비념>은 반쪽짜리 영화면서 열려있는 영화예요. 4.3 항쟁은 쉽게 설명한다고 그 전부를 알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들었던 의문이나 고민들을 잊지 말고 극장 밖으로 가져나가면 좋겠어요. 그저 ‘예전에 이렇게 슬픈 일이 있었구나’ 하고 끝내지 말고요.”

영화를 촬영하며 임 감독은 눈 내린 한라산에 올라 맨발로 눈밭을 뛰어보기도 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두려움에 떨며 산으로 뛰어 도망쳤던 사람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눈밭의 발자국과 허리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고 산길을 오르는 장면은 임 감독이 직접 몸으로 뛰어 만들었다.

“당시에 희생된 3만 명은 좌, 우 어느 한쪽을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뭔지 모르고 자신이 왜 죽어야하는지도 몰랐던 사람들이었죠. 낮에는 토벌대가 활동하고 밤에는 무장대가 활동했다고 하는데, 어느 전쟁터에서든 민간인들은 둘 중 한편에 조금만 도움을 줘도 상대편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갑자기 마을에 누가 쳐들어왔다고 하면 신발도 못 신고 겨울에 산으로 도망친 사람이 많았다고 인터뷰 때 들었어요. 산으로 도망갔다가 얼어 죽고 굶어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하고요.”

눈밭을 뛰는 ‘퍼포먼스’는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애도의 표현이었다. 개인이 하는 작은 규모의 굿을 뜻하는 제주 말인 ‘비념’을 영화 제목으로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임 감독은 영화 자체가 4.3 피해자들에게 바치는 ‘비념’이라고 말했다.

▲ 영화 ‘비념’의 한 장면 (사진 제공 / 인디스토리)

“4.3 항쟁을 알아가면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돌아가신 분들에게 애도를 전하고, 살아남아서 더 고통스럽게 사시는 분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런 걸 터부시하잖아요.”

그래서 <비념>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영화다. 임 감독은 4.3 항쟁이나 강정 해군기지 건설 같은 일들이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일어난다고 봤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뜻을 갖고 과거를 위로할 수 있다면, 과거의 일이 현재나 미래에 반복되지 않고 온전히 과거로만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은 <비념> 이전부터 임 감독의 작품과 예술 활동에 큰 줄기가 되어왔다.

영화 <비념>은 임 감독이 우연히 캠코더로 부모님을 촬영했던 십여 년 전 어느 날 시작됐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그가 카메라를 든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촬영한 영상을 다시 볼 때마다 익숙함에 가려져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들을 새로 발견하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아버지의 얼굴 표정을 제대로 관찰해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다. 임 감독은 그전까지는 그저 가족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얼굴을 발견했다.

기억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에 매력을 느낀 임 감독은 1970년대 도시개발 정책으로 서울에서 쫓겨나 광주대단지(현재의 경기도 성남)에 정착한 이주민, 베트남전 참전군인, 이주노동자, 임대아파트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거나, 그들과 함께 각자의 정체성과 공동체의 의미를 찾는 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영상, 사진, 설치 예술 등 다양한 방식을 택해 작품 활동을 해왔다.

임 감독이 제주 여행에서 동료의 외할머니를 만났을 때 할머니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꾸준히 관심을 가져온 주제인 가족 · 이웃 · 역사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그냥 스쳐지나갈 수는 없었을 거다.

“미래에 4.3 항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어요. 지금은 평화롭고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했는데 그런 끔찍한 일이 다시 일어날까싶겠지만, 그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미래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아직 <비념>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는데, 임 감독은 벌써 새로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는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이다. 지금은 ‘구로디지털단지’로 이름이 달라졌고, 여성 노동자들은 중국 동포 노동자들로 바뀌었지만 화려한 불빛에 가려진 기계 소리는 예전과 다르지 않다. 임 감독은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이 공간에서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했다. 임 감독은 “내가 고통 받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한국 사회의 답답한 구석을 들춰낸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이웃들 한가운데서 함께하고 있었다.

▲ 영화 ‘비념’의 한 장면 (사진 제공 / 인디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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