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 2]

내가 주영이네(가명) 집을 처음 방문하던 날은 정오의 햇빛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어느 봄날이었다. 화창한 날씨와 신록이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예쁜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던 날이었다.

주영이네 집은 변두리의 허름한 연립주택 2층이었다. 계단을 올라가 노크를 하니 한참만에야 내가 누구인지 묻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내 신원을 확인한 그녀는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어 주었다.

좁은 현관을 지나 거실에 들어섰다. 어둡다. 거실 천장 한 쪽에 작은 형광등이 달려 있었지만, 창마다 두껍고 칙칙한 커튼이 내려져 있어서 조금 전의 그 환하던 빛을 구경조차 할 수 없다. 거실 한편에 작은 남자 아이가 수건으로 만든 긴 턱받이를 하고 앉아있었다.

“저 아이가 주영이에요?” 조심스레 묻는 내 말에 주영이 엄마는 고개만 끄덕였다.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듯한 경계의 빛이 역력하다. 아이 앞에 앉아 아이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숨이 막혔다. 마치 횃불을 들고 동굴 속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불이 꺼져버린 듯한 당혹함과 난처함에 한참을 그냥 앉아있었다. 도대체 이 어둡고 무거운 느낌은 무엇인가?

ⓒ박홍기

주영이는 뇌병변장애아로 태어났다. 주영이 엄마는 몇 번의 유산 끝에 주영이를 낳았는데 저체중에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는 결국 지적 장애와 뇌성마비 1급으로 진단받았다.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불쌍한 마음으로 주영이 엄마는 아이를 붙들고 살았다. 하지만 남편은 달랐다. 술을 마시고 주영이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아이 앞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욕을 주기도 했다. 남편은 어린 주영이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그녀는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편은 참을 수 있었지만, 주영이에게 구타를 가하는 ‘아빠’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급기야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하고 말았다. 아이는 친척 손에 맡겨지고 주영이 엄마는 수감되었다. 1년 남짓 교도소에서 복역한 주영이 엄마는 정상참작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주영이와 다시 만난 것이다.

그날 주영이를 살펴보고 도와주기 위해 찾아간 내가 마주친 것은 어둠 속에 앉아있는 한 여인의 인생이었다. 누가 이 여인의 깊은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여인은 누구에게 자신의 아픔을 호소할 수 있을까? 유사 이래 가장 잘 산다는 복지국가, 선진사회, 종교 천지인 대한민국에서 이 여인의 인생을 어떻게 이해하란 말인가?

“하느님 거기 없는 줄 뻔히 알면서 /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 열고 / 하늘을 본다 /그나마 쳐다볼 곳 있어서 / 다행이라 여기며 / 뭉게구름 거느린 무심한 / 하늘을 본다

울어서 될 일 아닌 줄 뻔히 알면서 / 눈물 가득 담긴 눈 들어 / 하늘을 본다 / 그나마 눈물 흘러내리지 않도록 / 올려다 볼 곳 있어서 / 다행이라 여기며 / “거기 누구 없소”라는 마음으로 / 하늘을 본다” (김유철, <쳐다 볼 하늘이 있어 다행이다>)

그녀의 말없는 외침을 들을 때마다 자기 가슴을 쥐어뜯어서 그 피를 먹여 죽은 새끼들을 살려낸다는 펠리컨의 우화가 생각났다. 나는 그녀의 고통스런 몸짓과 한없이 가라앉은 침묵을 깨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주기적으로 주영이를 만났다. 그렇게 주영이와 조금씩 가까워지던 어느 날이었다. 베란다에 나가있던 주영이 엄마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머, 선생님, 얘 좀 봐요. 얘가 밖으로 기어 나왔어요.”

뜻밖의 밝고 명랑한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베란다로 나갔다. 주영이 엄마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아지를 손에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얘가요, 다른 강아지들한테 뒤쳐져서 얼마 살지 못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혼자 기어 나왔어요.” 동생네 집에서 맡긴 강아지 세 마리 중에 가장 약한 놈이 마음에 걸려 정성껏 돌보았더니, 기적처럼 살아났다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 무겁고 칙칙하던 커튼도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강아지가 들어있는 종이박스 옆에는 작은 화분에 노란 맨드라미가 피어있었다.

주영이네 집에 갈 때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kto)’가 떠오른다. 그 애절한 곡조와 서글픈 가사가 생각난다. 주영이를 하느님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노래처럼 마음은 한없이 애련한데 그 바닥 닿은 곳에서는 새로운 희망이, 생명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솟아오른다. 하나둘 늘어나는 그녀 집 베란다의 화분만큼 그녀의 마음에도 아름다움이 살아나고 있으리라. 어두운 커튼이 사라지고 노란 맨드라미가 핀 곳에서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강아지 한 마리 키워보실래요?”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