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 한상봉]

장애인이 성당 문턱을 넘어가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즈음에 언제나 단골메뉴로 등장한다. 이날을 전후해 장애인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체육대회를 열고 축제마당을 펼치지만, 정작 이들이 쉽게 교회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구제적인 시설 개선을 서두르는 성당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장애인의 날 즈음에 서울대교구 김용태 신부(사회사목 교구장 대리)가 담화문을 통해 “우리 교회 안에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은 비판이 교회 내부로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일부 본당에만 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으며, 장애아를 둔 부모님들은 장애아부 주일학교가 있는 본당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미사 참례가 어려운 실정”이라는 현실 인식이 구체적이어서, 이를 지켜보는 장애인과 가족들은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에 대한 현실적인 반론 역시 만만치 않다. “일선 본당에서 장애인 신자의 숫자가 적다는 이유로 편의시설을 갖추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본당 신자 대비 장애인 신자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서, 그 몇몇 신자만을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입해 엘리베이터나 장애인 전용 화장실을 만드는 일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한치 앞만 내다보아도 이런 시설이 반드시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 교회가 급격히 노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 서울대교구 명동대성당의 통로. 휠체어에 탄 장애인이 이 좁은 길을 지나갈 수 있을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 사진)

본당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 장애인들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교중미사, 특히 새벽 미사에 적극 참여하는 어르신들이 가장 먼저 엘리베이터의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을 때 기금을 마련해 성당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다면, 그분들의 노후 신앙생활이 편해질 것이다. 그분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듯이, 고행하는 마음으로 미사 가방을 쥐고 성당 계단을 오르는 것도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면, 너무 비약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본당 사제도 발이 삐끗해 ‘임시 장애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병약한 이들이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있다. 전철 정거장마다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장애인들만 사용하는가? 그렇지 않다. “무거운 짐 진 자들”들과 유아를 동반한 산모, 심지어 청년들도 급할 때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에 대한 배려가 다른 모든 이들의 어려움도 곁들여 해결해 준다. 그래서 본당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더라도 ‘장애인 전용’이라고 써 붙이지 말고 ‘장애인 노약자를 우선 배려해 주세요’라고 적어 넣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체 장애인들에게는 본당 문턱을 넘어서는 어려움도 있지만, 제단 접근권도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지체 장애인들은 미사 중에 독서를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 본당에서 그들은 계단에 막혀 독서대에 오르지 못한다. 공공시설들은 어디나 휠체어가 지날 수 있도록 계단 옆에 ‘경사로’를 설치해 둔다. 그러나 제단에 오르는 경사로가 있는 본당은 거의 없다. ‘가설 경사로’조차 없다. 이처럼 장애인들은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권도 침해받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 없음이 어떤 신학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한국 교회는 장애인을 신학교에 잘 받아주지도 않지만, 사제서품에서도 우선적으로 제외한다. “사제는 흠결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데, 언제나 공공연히 육신보다 영혼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교회가 불편한 육신을 빌미로 사제서품에서 장애인을 제외시키는 일은 납득하기 어렵다. 어느 수도회 소속의 장애인 부제는 몇 년째 특별한 사유도 없이 사제서품이 미뤄지고 있다. 이럴 때 ‘벙어리 냉가슴’이라고 표현하던가. 사제가 되고 나서 장애를 입으면 상관없지만, 이미 장애를 입은 사람은 사제가 될 수 없다는 억지를 교회에서 발견하는 것은 괴롭기 그지없다.

장애인들은 늘 예수님의 지근거리에 있었다. 그분이 이들을 치유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에게 시혜를 베풀지언정 ‘한 가족처럼’ 복음을 전해주지 못한다. 언제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베풂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장애인들을 예수님은 더욱 사랑하실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던 그분의 말씀이 여전히 쟁쟁하다. 그들 가운데 주교도 나오고, 사제와 부제도 나오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장애인 ‘전용’성당을 만들어 장애인들끼리 모여서 미사를 봉헌하지 않아도 좋을 세상이 오길 바란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더불어 거리낌 없이 미사에 참석하고, 제단에 올라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군대처럼 장애인에게 ‘초코파이’를 주는 사목이 아니라, 그들과 손을 잡고 연대하는 평등한 사목이 필요하다. 대전교구에는 ‘장애인사목부’가 있지만, 다른 어느 교구에도 ‘장애인사목위원회’ 같은 부서는 없다. 대부분 사회복지위원회 등에서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장애인 사목’은 ‘노동사목’, ‘농민사목’처럼 교회의 특별한 관심이 요청되는 분야임을 확인하는 4월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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