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최근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야기들을 보면 김연아 선수의 화려한 부활, 조금 실망스러웠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연예인들의 프로포폴 투약 혐의, 석 달이나 지났지만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다. TV와 신문에서도 연일 떠들썩하게 다루기도 하지만, 친구들과 수다 떨 때도 빠지지 않는 이야깃거리이기도 하다. 일명 ‘사회적 이슈’ 혹은 ‘화두’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낸 이들 가운데 이 분들도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혜민 스님, 법륜 스님, 김정운 교수, 안철수 후보,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 이들은 직업도, 나이도 다르지만 이 시대의 멘토라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대한민국 전역에 퍼져 있는 ‘힐링 바람’의 주역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음 ‘힐링’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이게 뭔가?’ 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나가는 누구를 붙자고 얘기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힐링에 빠져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멘토의 조언은 성공한 사람의 훈계로만 다가오는데

힐링의 원래 뜻은 ‘치유하다’는 의미인 heal에 ing를 붙여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치유되기보다는 도리어 넘쳐나는 힐링 바람에 지쳐가는 것 같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의 트렌드가 돼버려 힐링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다른 프로그램들도 조금만 유명하다 싶은 멘토가 있으면 앞다투어 출연시켰다. 그런가 하면 마치 템플스테이를 가거나, 적어도 한번쯤은 산에 올라갔다와야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들게 만드는 게 요즘 분위기 인 것 같다.

그래서 사실 나도 몇번 산을 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세속에 너무 물든 탓인지 하산 후의 뒤풀이를 너무 즐겨 오히려 다음날이 더 피곤한 경험이 많았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TV에 나와서 하는 멘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같이 공감 가고 맞는 말인 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그런 멘토들이 쓴 책들을 상당 수 구입하고 읽어보니 “자신을 좀 더 내려놔라”, “성공만 쫒는 것이 다가 아니다”,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등 그야말로 주옥같은 가르침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시대는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고, 그렇게 따라하다간 뒤쳐질까 겁이 나고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보면 멘토들의 이야기들은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졌고 점점 나와는 다른, 성공한 사람들의 훈계 정도로만 다가와 멀게만 느껴졌다.

▲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화면 갈무리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한 순간은 언제?”

그런데 며칠 전 내가 좋아하는 배우 한석규 씨가 출연한 <힐링캠프>를 보게 됐다. 내가 알기로 무척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모습을 비추는 것이다. 난 다른 출연자와 같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중간 중간 영화 홍보를 하다 끝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배우 한석규’가 아닌 ‘인간 한석규’로서 풀어놓은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한 순간은 언제냐?”라는 한석규 씨의 질문이었는데, 그 순간 ‘난 언제지?’ 하는 생각으로 머리속이 가득 차 버렸다. 살아오면서 ‘난 지금 행복한가’와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일까’만 생각하며 지냈는데, 살아온 날 중에 한 순간을 뽑으라니 갑자기 답답해졌다.

누가 내준 숙제도 아닌데 그때부터 TV는 보는 둥 마는 둥 내내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그토록 불행했던 것만은 아닐 텐데 몇 날 며칠 내 머리 속을 뒤흔드는 화두가 되었다. 그때부터 부모님과의 기억, 친구들과의 기억, 그리고 여행에서의 추억들을 하나 둘 천천히 떠올리기 시작했는데, 즐겁고 재미났던 기억들은 무수히 떠오르지만 과연 그 기억 중 하나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는지 나 자신에게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갑자기 어릴 적 가난과 부모님의 잦은 불화로 인해 힘들게 자란 것을 주위 사람에게 이야기하며 “이 정도면 잘 컸지”라고 스스로 자랑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항상 어릴 적 힘든 일들만 에피소드랍시고 말하고 있었는데, 가장 행복한 일 하나 떠올리는데 수많은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는 느끼지 못했지만 난 분명히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들로 학창시절 또한 도배되어 있었다.

그 순간 한석규 씨의 질문은 굳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가장 행복했던 일을 떠올리려 하다 보니, 내가 가진 작지만 행복한 기억들이 무수히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원동력으로 살아가고 있을진대, 결국 내 안의 행복한 기억들을 가두고 산 건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중 한석규 씨는 “녹은 쇠에서 생겨난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어버린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만든 녹에 점점 나를 먹혀가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필시 좋았던 일들이 많았을 텐데, 안 좋고 힘들었던 기억에만 사로잡혀 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쇠였는지, 그리고 나를 먹어 가는 녹은 무엇인지 잘 알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요즘 힐링, 힐링 하는 소리에 지쳐가던 참에, 진정한 ‘힐링’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얼마나 잘 들여다보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곧 봄이 온다. 다른 사람들처럼 벚꽃축제든, 산이든 강이든 어디론가 떠날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내 마음속의 캠핑 장비에 빠진 것이 없는지 잘 챙겨 앞으로의 멋진 여행을 편안하게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대웅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남자간호사로 일한다. 직업적 이미지와 달리 농구, 축구, 야구 등 거친 운동을 즐긴다. 술잔에 담긴 술보다는 마주 앉은 사람의 마음속에 담긴 이야기를 좋아하며, 특별한 이유 없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사람과 또 다른 만남의 장을 여는 소통으로 글을 쓰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려고 노력하는 보통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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