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

▲ 콘라드 비츠의 작품 ‘기적의 고기잡이’(1444년)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나타나신 장면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드러내 보이셨지만, 여전히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기 전 자신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 생업에 열중했습니다.

예수께서 처형을 당하신 후, 유다인들이 무서워 다락방에서 꽁꽁 숨어있던 제자들은 자신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를 ‘뵙고 기뻐’하였음에도, 그리고 성령의 숨결을 주시며 그들을 파견하셨음(요한 20,19-23)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간 곳은 자신들의 생업현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하고 토마스에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던 그들이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평생 어부로 살아온 그들이 허탕을 친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덧 아침이 찾아옵니다(요한 21,4). 신앙에서 ‘아침’은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시기임을 암시합니다. 어둠속에서 헤매던 ‘깜깜이 신앙’에서 벗어나 밝은 신앙의 눈으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사물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새벽 여명에 예수를 다시 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좀 잡았느냐?”(요한 21,5). 그들이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하자, 당신이 이르는 곳에 그물을 다시 치라고 명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자 너무 많은 고기가 잡혀 그물을 끌어 올릴 수조차 없었고, 큰 물고기만 세어보아도 153마리가 잡혔다고 오늘 복음은 증언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왜 하필 153이라는 숫자를 제시했을까요? 먼저 <고백록>으로 유명한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들어봅시다. 그는 요한 복음서를 해설해 놓은 <요한 복음서에 관한 연구>(in evangelium joannis tractatus)에서 “1부터 17까지를 차례로 더하면(1+2+3+4+…+16+17) 그 합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153이다. 17은 7과 10이 더해진 숫자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모두에서 숫자 3과 더불어 모두 완벽성, 무한함을 의미한다. 이 숫자는 은총의 무한성을 상징하며 또한 이 은총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언급합니다. 이 역시 아우구스티누스 개인의 해석일 따름입니다. 현대 성경학자들도 이 숫자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한 구절에 제 온 신경이 집중되었습니다. “무엇을 좀 잡았느냐?”(요한 21,5) 하는 예수의 물음입니다. 예수의 이 물음은 제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신앙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생활과 활동 안에서 무엇을 얻고, 얻지 못하고의 차원, 그런 몽상적인 차원의 물음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현실화, 구체화에 대해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하지 않는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예수와 함께 걷지 않는 길의 종착이 어디인지 말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했던 3년여의 공생활 동안, 제자들은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라는 분이 자신들의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희미한 기대도 있었고, 또한 그분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곧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그분의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그 부족함을 그들은 예수의 기적으로 채웠고 또 그분의 신원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잡히시자마자, 제자들은 두려워 자기 한 목숨 연명하기 위해 모두 숨어버렸습니다. 마침내는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직까지도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온전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직접 체험한 제자들마저 이러한데, 하물며 그분을 한 번도 뵙지 못한 우리들이야 말로 표현해 무엇 하겠습니까?

“무엇을 좀 잡았느냐?”하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예수와의 충실한 관계가 없으면, ‘무엇’은 내용이 없는 허무한 질문이 되고 맙니다. 충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찬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여놓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독실한 감리교 신자는 이라크를 무대로 살상을 자행했습니다. 초대형 교회의 장로인 어떤 이는 우리의 강을 마구 헤집어 놓고, 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반성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중요했지만, 결코 그 ‘무엇’ 안에는 예수께서 자리할 공간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을 찾아 나서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과 함께하는 삶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십니다. 밤새 헛그물질만 했던 그들에게 넘치도록 잡힌 물고기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의 삶 곳곳에서 예수의 땀내와 우리의 수고가 항상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가득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좀 잡았느냐?”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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