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살아온 자들처럼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 중요해지고, 방송 프로그램은 오직 시청률 1위만을 향해 달려가는 풍토 말이다.

‘백년’ 동안 훈습된 ‘유산’은 어쩌면 그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 듯이 구성된 드라마가 있다. MBC 주말극 <백년의 유산>은 퍼즐 같은 혹은 패치워크 같은 드라마다. 등장하는 중견 배우들이 과거에 했던 히트작들, 거기서 맡았던 대표적 역할들, 그 분위기와 이미지까지 거의 '메소드'처럼 자기복제하는 연기가 우선 눈에 띈다. 그것을 스토리라인과 상관없다시피 캐릭터화 했고, 극이 회를 더해갈수록 그 캐릭터가 스토리를 이어가는 중이다. 심지어 배역의 이름조차 중요하지 않다. 그냥 어떤 배우의 얼굴 그 자체만 보인다. ‘새로움’을 그 어느 때보다 강조하는 이 시대의 드라마 제작풍토인가? 배역과 이미지 재활용, '인기 있었던 부분'을 이것저것 패치워크로 조합하면 ‘새’ 인기 드라마가 될 것이다? 시청자는 시간이 지나면 수긍하고 그냥 본다?

자사제품 혼합복제의 문제점은 뻔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와 줄거리와 장면들과 인과관계를 매호 반복하려니 당연히 모든 게 극악무도해 진다. ‘막장’이라는 말조차 식상할 뿐이다. 한계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사 드라마들도 다 비슷비슷하니 그냥 ‘그 밥에 그 나물’로 보일 정도로 시청자들도 무뎌졌다. 신조어가 나와야 할 것 같다.

무엇을 위한 수난과 고통의 반복인가?

▲ 사진출처/MBC 홈페이지 갈무리
<백년의 유산>은 초반부터 더 이상 심할 수 없는 ‘며느리 수난사’로 시작했다. 그야말로 수난을 위한 수난이었다. 초반 박원숙-유진의 관계에서 ‘고부갈등’이란 말은 들어맞지 않는다. 갈등이란 모름지기 양자의 입장이 어느 정도는 동등해보여야 가능하다. 일방적인 관계일 땐 핍박과 착취일 뿐이다. 아들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휩싸인 재벌가 회장님과 힘없는 며느리, 정신병원 감금과 기억상실 후에도 불륜으로 몰아 매장시키려는 음모 등등 그저 한쪽이 끝없이 당하는 이야기였다. 진부한 설정과 전개를 폭언과 악행으로 드라마화한 것이었다.

일단 어떤 관계의 ‘기본’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결혼은 결혼답지 않고 남편은 남편답지 않고 이혼도 이혼답지 않다. 결혼도 이혼도 구박도 속박도 너무 스케일이 크고 극단적이다. 구체성이나 뚜렷한 사유가 안 보인다. ‘왜’는 없고 그저 ‘목표물’만 공격한다. 곁에 있을 때는 그렇게 내쫓는데 혈안이더니, 이혼한 뒤에도 여전한 제 소유물처럼 군다. 그래서 이혼 뒤에는 감시와 ‘되찾기’에 한동안 골몰했다. 최원영은 왜 이혼한 전처에게 집착할까? 왜 한때 시어머니였던 박원숙은 유진을 평생 괴롭힐 권리라도 있는 듯 당당할까?

한없이 당하지만 늘 착하고 어여쁜 여주인공 민채원의 비현실성도 유진이라는 ‘배우’를 보면 이해가 간다. 늘 비슷한 순진덩어리에 차분한 예쁜 딸과 며느리의 역할을 해왔다. 친정으로 돌아간 유진은 과거 MBC 드라마 <인연 만들기>와 <신들의 만찬>등을 연상시킨다. 박원숙은 <겨울새>에서 찌질한 마마보이 아들과 못된 시어머니로 짝을 이뤘던 악행을 업그레이드 한 듯하다. 아들이 윤상현에서 최원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역할이 밑바닥 인생임에도 <신들의 만찬> 때의 우아한 외양 그대로인 전인화, <천 번의 입맞춤> 때처럼 비밀을 숨기느라 그늘진 차화연, 자식을 지키지 못하는 <내 마음이 들리니>의 바보 아빠 연기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정보석, 다 어디선가 본 것들의 선명한 이미지들을 이리저리 흩어놓은 조합이다. 게다가 전부 과거에 기댄 이미지다. ‘동시대인’은 없는 듯하다.

물론 중견배우들의 연기력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다.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혼신을 다하고 있는지도 알겠다. 그러나 드라마의 전체 그림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이를테면 이목구비의 예쁜 부분만 여러 사람 얼굴에서 하나씩 떼어다 조합해 한 사람의 얼굴을 만들면 미인이 아니라 이상한 얼굴이 되고 만다.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 사진출처/MBC 홈페이지 갈무리

스토리의 정당성이 드라마의 기본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꼭 들어 가야할 이유 없이 꼭 그 정도여야 하는 강도의 필연성 없이 짜여진 극단적 구조와 사건은, 전체 그림을 망가뜨린다. 시대도, 맥락도, 감정도, 모두 이해불가인 채 그저 시간만 때우게 된다. 시어머니의 구박이나 며느리 설움, 부당한 대우, 뜻밖의 로맨스 등도 갈등을 모두 모아 한껏 증폭시키면 재미있을 것 같지만, 맥락이 닿질 않으니 전부 따로 논다. 캐릭터나 배경 또한 과거와 현재 이미지가 마구 뒤섞여 혼재돼 있다. 각각의 지체들이 따로따로 굴러가니 급기야 전체적으로는 통제불능이 된다.

이정진이 맡은 재벌2세 ‘본부장님’ 이세윤을 보고 있으면 안타깝기까지 하다. 영화 <피에타> 속의 그와 도저히 같은 배우로 보이지 않는다. 여태껏 드라마에 나온 '이혼녀 사랑하는 재벌2세' 중에 가장 매력 없고 시대착오적이고 센스 없는 젊은이다. 이정진의 배역만이 어찌 보면 (그나마) ‘재탕’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래서 물과 기름처럼 뜨고 개연성이 떨어져 보인다. 옛날 화보 같은 배경 속에서 혼자만 ‘현대적’이다. 초반의 의로운 건달 이미지와 현재의 재벌2세 이미지가 일관성도 없다.

무엇보다 현실에는 드물고 드라마에서만 흔한 이런 로맨스, 정말 이상하다. 왜 '가장 멋진 남자'와 ‘착한 여자’는 꼭 이런 식으로 만나야 하나? 그녀의 ‘잘못된’ 결혼도 수난사도 친정으로 돌아온 이유도, 다 ‘본부장님’을 만나기 위한 귀결이었나? 정말 황당한 이 귀결점은 게다가 식상하고 지루하다. 음식 소재를 전면에 내세워 협찬과 안정적 시청률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겠지만, ‘국수’나 ‘국수집’은 어느 새 소품만도 못해졌다. 잃어버린 미각과 로맨스, 출생의 비밀과 수많은 ‘장금이’들의 비슷비슷한 조합도 십년도 넘었다.

<백년의 유산>은 원래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것일까? 백년을 이어왔다는 국수집의 이야기는 대체 언제 어떻게 어디서 중심을 잡을 것인가? 놀라운 것은 국수집 자손들도 모두 ‘가문의 국수’ 보다는 할아버지의 땅에 더 관심 있다는 사실이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 가문의 비법을 억지로 습득하려는 듯이 보인다. 결국은 가업도 부동산 가치로만 남는다는 뜻인가? 이 집 어른들은 가문의 딸을 지키지 못했듯이, 가업 또한 지키지 못하게 될 것인가? 백년의 역사를 들먹인 게 로맨스를 위한 들러리에 불과했듯이, 그 거창한 제목은 잘못 단 간판이었을까?

체스의 말판처럼 움직이는 배우들과 이미 시청자도 다음 상황이 연상되는 식의 전개는, 종영까지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패치워크의 구멍과 뜯어진 올과 바느질이 미처 안 된 엉성함을 배우 개인의 역량으로 메우라는 무리한 요구만 심해질 것이다. 총체적 부실이다. 시청자가 그리 만만한가.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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