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hic et nunc)’에서 영성 다시 보기-심백섭]

지난 3월 13일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베르골리오 대주교가 제 266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교회 안팎에 큰 반향이 일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새로 선출된 교황은 처음으로 비유럽권 남반구 출신인데다 도저히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예수회 출신인 데에 더하여 교황명으로 택한 프란치스코도 처음이었다. 하나 하나 비상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재작년부터 예수회 역사에 관한 강의를 준비하느라 더욱 이냐시오 영성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던 터여서 특별히 교황명 프란치스코가 가진 함의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가톨릭 수도 전통의 도맥 베네딕도, 프란치스코, 이냐시오

가톨릭 수도 전통의 도맥은 아주 과감하게 추려내면 베네딕도->프란치스코->이냐시오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이런 도맥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터이지만, 세 분에 관한 영성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묘사나 일화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중세 초기에 활동한 베네딕도는 산골(valley)을 좋아하였고, 중세 전성기의 프란치스코는 소도시(town)를 좋아했으며, 중세말 근세초의 변곡점에 위치한 이냐시오는 대도시(metropolis)를 좋아했다는 유명한 말에는 서로의 다름이 두드러진다. 베네딕도 수도승들과 프란치스코회 탁발수도자들과 예수회원들이 밤에 함께 전례를 하다가 전기불이 나갔을 때 안에 남아 기도문을 암송하기와 밖에 나가 별을 보며 하느님을 찬미하기, 그리고 천정 위로 올라가 전기 시설 고치기로 각각의 영성을 묘사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상이한 특성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영성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러한 불연속성 이상으로 굵직한 연속선도 발견된다. 베네딕도가 수도생활을 했던 수비아코를 찾아 순례여행을 다녀온 프란치스코는 그를 본받아 가시덩굴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한 예이다. 또 프란치스코회는 베네딕도 수도원의 오랜 전통을 이어 받아 지성(하느님에 대한 학문적 이해)보다는 의지(하느님에 대한 사랑)를 강조하는 영성을 보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은 이냐시오에게 미친 프란치스코의 영향이 얼마나 뿌리 깊고 두드러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프란치스코에 깊이 영향 받은 이냐시오, 가난하고 이름 없는 순례자로 세상을 돌아다니고자
 
우선 어린 시절부터 이냐시오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영향은 깊이 각인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냐시오는 사촌 수녀인 마리아 로페즈로부터 프란치스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녀는 이냐시오가 여섯 살 때 발원한 그 지역 프란치스코 수녀원의 창설 주역이었다. 다음으로 이냐시오의 인성 형성에 중요했던 15세부터 26세까지에도 영향이 적지 않았다. 궁정인으로서 도제교육을 받던 때 그의 후견인인 재무대신 부부는 프란치스코 영성을 따르는 수도회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며 또 그곳에서 이냐시오에게 조언한 마리나 데 게바라는 이냐시오의 고모로서 프란치스코회 수녀였다.

30세에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이냐시오는 로욜라 성에 돌아온 첫 달 동안 성 도미니코와 함께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예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이냐시오가 가장 위로를 받는 일은 별빛 찬란한 하늘을 조용히 바라보는 일이어서 밤마다 별들을 관상했던 일, 그리고 그가 회심 후 철저하게 가난하고 천대받을 것이며 이름 없는 순례자로 온 세상을 돌아다니려는 결심을 한 것도 프란치스코의 영향이었다. 회심과정에서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야, 네가 진정 나를 알려고 하는 욕망이 있다면, 쓴 것을 달게 받고, 너 자신을 경멸하여라.” 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였다. 내가 이냐시오의 말로 알고 있던 “시체처럼 순명하라”는 말도 알고 보니 원래 프란치스코의 말이었다. 회심의 결과 이냐시오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그곳 이슬람인들 사이에서 살고자 하였는데 이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과 권고이기도 하다. 예루살렘 순례 길을 떠나려고 하면서 입고 있던 옷을 거지에게 주고 대신 거지 옷으로 갈아 입은 일도 프란치스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예이다.

순례 길에서 돌아온 후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함께 가난이 삶의 방식이면서 동시에 메시지의 핵심이기도 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추구하였다. 이냐시오 영성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겸손한 예수, 특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가 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모든 면에서 예수를 닮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 이후 가장 예수를 닮은 성인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냐시오가 수도회를 발족하면서 그 이름을 ‘예수회’라고 한 것도 프란치스코의 예수 중심적 영성에서 발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364]>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성인들, 특히 성 프란치스코와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고 적시한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에서 상상력을 활용하는 관상, 그리고 이냐시오 영성을 요약한다고 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라는 것도 프란치스코 영성과 맞닿아 있다.

자본의 위력이 끝을 향하는 지금, 다시 처음을 돌아봐야 할 때

그렇다고 해서 이냐시오 영성이 프란치스코 영성과 동일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냐시오 영성에는 도미니코 영성을 비롯하여 다양한 영적 대가들의 영향 또는 보화들이 녹아들어 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영향도 적지 않고 근대적 실용주의가 중세적 신비주의와 묘한 결합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가장 중심되고 중요한 영향을 꼽는다면 단연 프란치스코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시대는 중세의 전성기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적 위세가 발흥한 때였다. 부의 축적이 절대시되려고 한 시대의 도전 앞에서 돈을 정복한 프란치스코는 오직 돈벌이에 혈안이 된 부자들과 자본주의 신흥세력을 겨냥하였다. 중세와 근세의 변곡점에 위치한 이냐시오 시대가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자본의 추구가 세계화를 향해 이베리아 반도를 막 출항했던 때라면 서유럽이 동인도와 서인도를 넘은 지 오래인 우리 시대는 이제 세계화와 자본의 위력이 끝을 보는 지점으로 치닫고 있다. 지금 여기는 바로 이 끝 자리이다. 다시 처음을 돌아보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 지점이다. 이제 세계화 시대가 처음 열리던 이냐시오를 거쳐 은행과 대학이 처음 출현한 프란치스코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필 일이다. 그리하여 예수회 출신이 택한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에서 이 중대한 역사의 흐름을 포괄하는 이성의 간지, 또는 성령의 이끄심을 감지하는 데서부터 시작할 일이다.
 

심백섭 신부(예수회 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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