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2]

나의 책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이 처음 나온 것은 1999년이었다. 그 해 10월, 책을 펴내기 위해 편집과 디자인 등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마지막까지 남은 문제가 표지 디자인이었다. 출판사에서 제시한 디자인이 전반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으나 다만 표지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자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주름과 수염 투성이에다 귀신처럼 늙은 공자의 얼굴이 막무가내로 싫었다. 작업을 보류시키고 나는 수염이 거의 안 난 젊은 공자의 얼굴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국립도서관, 국회도서관 등 있을 만한 곳의 이런저런 자료를 다 뒤졌지만 '젊은 공자'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공자행적도에 두어 컷이 나오기는 했지만 거기의 젊은 얼굴은 너무나도 조그만데다 붓자국 몇 개로 대충 그려져 있어서 도저히 공자의 얼굴이라고 소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공자의 정신적 깨달음은 70대 노인의 것이 아니다

결국 나는 젊은 공자를 포기하고 그 대신 목탁(木鐸)이라는 춘추시대의 기물 그림을 표지 한가운데에 싣기로 출판사와 합의를 하였다. 목탁은 논어 제3팔일편 24장에 나오는 것으로 옛날 관헌들이 새 정령을 반포할 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흔들고 다녔던 요령 같은 것이었다. 당시에 이미 목탁은 시대를 일깨우는 선각자를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미는 충분했다. "하늘은 장차 우리 선생님을 목탁으로 삼으실 것입니다"(天將以夫子爲木鐸) 하는 어느 제자의 결연한 목소리를 생각하면 나름대로 멋진 선택이기도 했지만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는 아무래도 젊은 공자의 얼굴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면 나는 왜 늙은 공자의 얼굴을 그토록 기피하였던가? 늙은 얼굴 자체가 싫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나는 공자의 모든 정신적 성취가 단지 70대 노인의 것으로 간주되는 작금의 현실을 내 나름대로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은 '공자' 하면 바로 이런 전제를 깔지 않을까?

"공자? 위대한 인물이지. 동양에서 그보다 위대한 인물은 없지. 그러나 그는 70대 노인이었어. 파란만장한 삶의 편력을 거친, 정신적으로 백전노장이었지. 나는 지금 겨우 스무 살이야. 열심히 노력한다면 언젠가 나도 그 나이가 되었을 때 비슷하게 될 수 있을는지는 몰라. 그러나 아직은 아니야. 그가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나에게 있어서는 까마득한 세월 저 쪽의 세계지."

열 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서른 살에 정립되었다는 공자,
어려서부터 세상의 숨겨진 면모를 알고 싶어 먹지도 자지도 못한 그의  열정


논어를 읽는 대부분의 청년들은 무의식 속에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들의 의무를 회피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적어도 나의 논어를 읽는 청년들에게만큼은 그들이 나이의 방패 뒤에 숨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얼굴 그림 하나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최소한 그런 문제의식만이라도 갖게 하고 싶었다. 사실 논어에 담긴 대부분의 지혜와 안목은 결코 70대 노인만의 것은 아니었다. 실제가 그랬다. 그의 정신이 모습을 갖추고 역사에 출현한 것이 몇 살 무렵이었는지를 말해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그런 증거가 많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자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너무나도 명백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열다섯이 되어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 정립되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현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는 천명을 알게 되었고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응하였으며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吾十有五而志于學,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順,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2/4

그는 분명히 열다섯 살 때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 때에 섰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논어에 담긴 그의 대부분의 관점이 그의 나이 서른 살 무렵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자들과의 대화 도중에 간간히 내비치는 자신의 성장기의 모습은 지금도 우리를 감동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일찍이 종일토록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자지 않으면서 생각해 보기도 하였으나 무익했고 배우기만 못하였다."
(吾嘗終日不食,終夜不寢,以思,無益.不如學也.) 15/31

그가 말한 일찍이(嘗)가 언제였을까? 나는 그 시기가 대개 그의 10대 또는 20대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그가 스스로 서른에 섰다(立)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단지 인간과 이 세상의 숨겨진 면모를 알아보겠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하루 종일 먹지도 않고 밤새도록 자지도 않았다는 이 진술을 오늘날의 우리들, 특히 젊은이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접근해 본 사람이라면 '나는 이제 갓 스물이니까, 공자야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이니까' 하고 자신과 공자 사이에 무책임하게 담을 쌓지는 못 할 것이다. 내가 젊은 공자의 얼굴을 찾아 헤맨 것은 바로 그런 필요성에 조금이라도 자극을 주고 계기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에서 공자 역을 맡았던 배우 주윤발
공자는 젊은 나이에 자신을 구현하였고 또 젊은이들을 상대로 가르쳤던 것이 사실이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공자학단에 입문하는 젊은이들의 연령은 대개 15-17세 정도로 요즈음으로 치면 고등학교 입학연령이나 빠르면 중학교 졸업반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것은 공자의 가르침이 그 연령대에서부터 필요하고 또 적용이 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심지어 공자는 남들이 너무 어려 상대조차 하려하지 않는 아이도 만나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호향(互鄕)에 사는 함께 말하기 어려운 아이를 만나시니 문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나아감에 함께 하는 것이지 그의 물러남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심하다는 것이냐? 사람이 자신을 깨끗이 하여 나아가면 그 깨끗함에 함께 해주는 것이지 그의 모든 행적을 감싸주는 것은 아니다.”
(互鄕難與言童子見,門人惑.子曰;與其進也,不與其退也.唯,何甚!人潔己以進,與其潔也,不保其往也.) 7/31

과연 얼마나 어렸기에 함께 만나 이야기하는 것만 가지고도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견해차가 발생할 정도였을까? 동자라고 표현하였으니 요즈음으로 치면 어쩌면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절대 연령이 몇 살이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가르치는 것이 제자들이 보기에는 의아한 것이었지만 공자가 보기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는 이 차이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초등학교 5, 6학년 아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에게 나아감(進)과 물러섬(退)이 있고 그 문제를 당사자가 자신의 과제로 수행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긴 공자의 예리한 인간 통찰을 더 눈여겨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배움에 뜻을 두는 일'이 젊은 그대에게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살펴야

그렇다면 "나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인데..." 하고 말하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각성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스무 살은 공자 자신과 대비를 하든 아니면 공자가 가르쳤던 당시의 젊은이들과 대비하든 오히려 너무 늦은 나이인지도 모르겠기 때문이다. 과연 두려워 할 일이 아닌가? 공자가 자신의 열다섯 살 때의 일이라고 분명히 증언한 "배움에 뜻을 두는 일"(志于學)이 스무 살의 나에게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무언가를 생각하기 위해 종일 아무 것도 먹지도 않고 밤새 자지도 않고 지새워 본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나의 스무 살이 이미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사실, 삶의 진실은 이미 나를 비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은가?

그의 가르침이 본질적으로 노성한 것이어서 노년이 되기 전에는 터득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견해는 논어의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나이 40이나 50을 넘어서면 본질적인 영역에서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오히려 어렵지 않겠느냐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은 눈에 띄고 있다.

"후진들을 두려워할 만하다. 어떻게 새로 등장할 자들이 지금만 못하리라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십, 오십이 되어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면 그 또한 두려워할 정도가 못된다."
(子曰;後生可畏.焉知來者之不如今也?四十五十而無聞焉,斯亦不足畏也已.) 9/22

공자가 70살이 넘도록 산 것은 살다가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오래 살아 자신을 좀 더 성숙시켰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가 자신을 우리가 아는 공자라는 역사적 인물로 구축한 것은 70의 연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젊은 공자의 얼굴을 구할 수 없어 대체했던 목탁은 2009년 출판사가 재판을 찍을 때 무엇 때문인지 슬그머니 공자 전신상으로 다시 바뀌고 말았다. 저자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찍은 재판이라 표지는 고사하고 몇 군데 고쳐야 할 기초적 오류마저 고치지 못한 재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재판에서는 지금까지도 도무지 나의 책 같은 느낌을 받지 못 하고 있다.

지난 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논어 관련 글을 연재하기로 하고 첫 번째 글이 연재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화면을 여는데 나는 또 다시 노성하신 공자님이 댓자나 되는 수염 사이로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는 모습과 마주쳐야 했다. 공자님! 참 집요하게도 따라다니십니다. 기왕 따라다니시려면 그 옛날 당신이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찾아 헤매시던 그 젊은 날의 눈빛 형형한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는 없었던가요? 그리하여 저 같은 사람에게 '너는 무엇을 하느라 네 일생을 허비하였느냐? 머리는 왜 그리 세었으며 지금 그 나이에 아직도 무엇을 찾겠다고 그리도 초조하게 우왕좌왕하고 있느냐?' 하고 제 무디어가는 마음에 쾅쾅쾅 대못을 박아주실 수는 없었던가요?

생각하니 공자를 생의 사표로 삼는다는 사람이 그의 모습을 한사코 피해 다닌다는 이 사실이 무슨 코미디 같기도 하다. 재작년에 나는 중국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를 보았다. 성인의 생애를 줄거리로 한 영화가 다 그렇듯이 그다지 신통한 영화는 아니었다. 다만 하나 괜찮은 것이 있었다면 공자 역으로 나온 주윤발의 잘 생긴 얼굴과 노련한 연기였다. 영화가 무르익어 가니까 주윤발이 정말 공자처럼 느껴졌다. 편집자님. 젊은 공자를 초빙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 잘 생긴 주윤발을 올려주시는 것은 어떨는지요? 그는 그래도 훨씬 젊어 보였으니까요.
 

이수태
32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지런한 독서와 자기 성찰로 계속 집필 활동을 해 왔다. 그 동안 낸 책으로 <새번역 논어>,<논어의 발견>,<어른되기의 어려움>,<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2012년 퇴직 후 강화도에 집필실 겸 연구소를 마련하고 활발한 저술 활동과 함께 수사학 연구, 강연 등에 매진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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