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사목일기]

“강물이 많이 빠져, 뱃길로 들어가기는 힘들겠어요.”
친구가 찾아와 몇 년 전 사목 했던 꼼뽕꼬를 보여주고 싶었다. 전화를 넣어 물길 따라 꼼뽕꼬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얼마 전 부임한 후배 신부는 그렇게 대답했다.

금요일 오후

강을 따라 한 시간 남짓 차로 들어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바짝 마른 길은 트럭 바퀴가 할퀴어 여기저기 깊이 파였고 붉은 흙가루가 구덩이를 감추고 있다. 막 수확한 나락을 햇볕에 말리느라 길 양쪽으로 누런 나락이 길게 깔려있다. 나락을 실어 나오는 트럭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마주 오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길가의 나락을 밟고 올라 길을 터 주어야 했다. 나락을 펴던 마을 사람들이 고무래를 쥔 채 말없이 나락을 뭉개고 올라선 우리 차를 바라본다.

꼼뽕꼬 성당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마자 친구는 “여기까지 왜 들어왔을까? 선교만은 아닌 듯하고…”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는 왜 여기까지 들어왔을까?' 우기마다 강물에 깎여 나가는 성당 앞 좁은 길. 거기에 서서 강을 내려다보니 물은 어디론가 다 빠져나가고 건너편으로 물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깊게 할퀴어진 붉은 진흙 벽이 마주 서 있다.

토요일 아침

10 째 꼼뽕꼬 사목을 하는 태국 수녀가 아침을 챙겨준다. 어제저녁 먹다 남은 밥은 굳어져 있다. 늘 생글거리는 수녀는 주걱을 찔러 밥을 잘게 부수고, 물을 부어 다시 끓인다. 또 절반은 계란을 풀고 기름을 부어 볶아 내온다. 정성이 고마웠지만 밥이 넘어가질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는가? 프놈뻰에 너무 오래 있었나? 녹차에 말아 밥을 억지로 넘기고 나니 후배 신부가 강 건너편으로 신자들을 방문하러 가자 한다. 내키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그립고 그간의 소식도 궁금했지만 그들의 길고 소소한 넋두리는 언제나 아쉬운 소리로 끝나는 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놓고 뭘 달라 하면 난 할 말을 잃곤 했다. 오죽했으면 여기 본당 주임을 하던 크마애 신부조차 “이 사람들은 우리를 은행으로 아나 봐”하고 역정을 냈을까.

“손님이랑 갔다 와. 난 안 갈래.”
그 소리에 후배 신부는 내가 함께 갔으면 하는 얼굴로 날 쳐다본다. '친구도 데려왔으니 내가 가는 게 도리인가? 하기사 그들이 궁금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후배 신부는 기어이 내 확답을 듣고서야 일이 있다고 먼저 나간다.

따라갈 채비를 하는데, 마르고 검은 얼굴에 깊은 눈의 아이가 내디딜 때마다 부러질 듯 휘청거리는 사제관 나무 마루를 밟고 들어와 말없이 앉는다. 위에 걸친 크고 헐렁한 조끼는 겨드랑이 밑으로 마른 갈빗대를 드러냈다. 어디서 본 듯했다. '후배 신부에게 볼일이 있나?'
“넌 이름이 뭐니?”
“….”  
아이는 대답 대신 나를 쳐다본다.
“넌 이름이 뭐야?”
“M”
“너 밥 먹었니?"
"…"
아이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이를 앉히고 남은 볶은 밥을 가져다 덜어주었다. 여느 때 같으면 혼자 먹는 이 앞에 앉아 말동무도 잘하건만 이 아이 앞에는 왠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밥 먹고 그릇은 그냥 상 위에 놓고 가면 돼.” 하고 일어서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동네를 걸으며 후배 신부에게 한 아이가 와서 남은 밥을 주었다고 했더니 후배는 강을 건너온 그 사내아이 이야기를 했다.

비가 새는 초막 집에서
넷째 다섯째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행복했는데,
아버지는 몇 해 전 들짐승을 잡다가 감옥에 갔다 왔고
술 마시고 엄마를 매일 때렸다.
엄마는 가슴에 멍이 들었나,
정신 줄을 놓았고
맞던 데로 자식을 때려
아이들은 밥 대신 매를 먹고
학교 대신 벌판을 쏘다니다
강 건너 신부 손짓에
벌건 속살을 드러낸 강을 건너왔다.
성당 일을 보는 R네 집에서 먹고 자게 하니
아이는 R을 졸졸 따라다닌다.

그래. 그 아이였어. 4년 전 여기서 사목을 할 때 강 건너 여자가 쌍둥이를 낳았는데 먹을 게 없다기에 걱정스런 마음으로 찾아갔다가 만난 그 집 맏이.

일요일 아침

눈을 뜨고 씻고 복음을 읽고 미사 준비를 하는데 빨강 가방을 멘 아이가 문 앞에 서 있다. 아이의 눈은 물 빠진 강의 벽만큼 위태롭고 깊었다. 미사를 마치고 짐을 차에 싣고 꼼뽕꼬를 떠날 채비를 하는데 후배 신부는 차 앞에서 그 아이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어디선가 기증받은 듯 가슴 왼편에 무슨 기념 로고가 새겨진 노란 셔츠를 입힌다. 옷을 벗기고 입히는 손은 어린 시절 동네 공중목욕탕 탈의실의 내 아버지 손길 그대로였다. 새 옷이 좋은지 아이는 웃었지만 샛노란 색에 받쳐 얼굴이 더 검게 보인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게 후배 신부가 "얘도 함께 나가요" 라고 덧붙인다.

꼼뽕톰으로 나가는 차 안에서 뒷자리 친구 옆에 앉은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꼭 껴안고 있는 빨간 가방은 한국에서 쓰다 버린 재활용품이었다.
"넌 이름이 뭐니?"
“….”
“넌 이름이 뭐야?”
"Y"
“…”
이번엔 내가 말이 없다. 난 더 이상 여기서 사목도 하지 않고, 잠깐 왔다 다시 떠나기에 이 아이의 삶에 한 발 더 들어가도 되는지 자신이 없다. 이 아이는 어른들처럼 대놓고 뭘 달라고 하지도 않을 텐데. “어디 가니?”라는 물음이 입속에서만 맴도는데 후배 신부가 눈치를 챘는지 한국말로 귀띔해준다.

"M 동생이에요. 아침에 엄마가 내쫓으며 ‘가서 다시 오지 마’라고 했데요. 꼼뽕톰 성당 보육원에서 지내게 하려고요.“

깊게 파인 구덩이를 지나는가 차는 심하게 덜컹거렸고 가슴 속에선 울컥 무언가가 쏟아지려 한다. 억지로 웃으며 뒤돌아 다시 Y를 본다. 낡은 빨간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눈이 마주치자 Y는 가방을 꼭 껴안은 채 수줍게 웃는다. 소풍이라도 가는 듯.

Y도 강을 건너왔다. 형 M이 그랬듯이.
강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다시 파여 나간 깊은 속살을 물 밑으로 감출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강물이 성당 앞 좁은 길까지 차올라 찰랑거리면 강 이쪽과 저쪽은 큰길 하나 건너듯 가까워 보일 테고.

▲ <깊은 눈> 2009 캄보디아, 꼼뽕톰, 꼼뽕꼬 ⓒ김태진

김태진 신부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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