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
.

- (<여성> 1939. 4.) 전문

남자는 진심이다.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아서 그는 연인 ‘제제’에게 필사적이다. 만날 때마다 결혼하자고 조른다. 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다해 구애한다. 아버지가 폐암으로 투병하시게 되고 병세가 악화되면서 그의 불안감은 점점 더 증폭된다. 어머니마저 아버지 간병으로 병원살이를 하게 되자, 혼자 남겨진 그의 일상은 훨씬 더 힘겨워진다. 걱정과 두려움만 깊어진다. 외로움은 뼈에 사무친다. 몸도 불편하고 사는 곳도 멀어 한 달에 고작 한 번 데이트를 할 수 있기에 더 애가 탄다. 제제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남자는 그 생각뿐이다. 그럼에도 조급하게 굴었다가는 제제가 달아날까 봐 함부로 재촉도 못한다. 그는 절박하다.

여자도 진심이다.
그 남자는 좋지만, 좋아서 8년째 아껴가며 만나고 있지만 결혼은 두렵다. 자신이 없다. 그래서 그 남자가 “오빠랑 사는 거 생각해 봤나?” 하고 간절히 물을 때마다 할 말이 없어 고개만 숙이고 있다. 생각은 이미 많이 했다. 처음 청혼을 받았을 땐 하늘을 나는 듯이 기뻤다. 기다려 왔던 고백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에는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생각하면 할수록 막막하다. 이대로는 안 되는 걸까.

여자가 더 현실적인 것일까, 남자가 더 열정적인 것일까. 둘 다 몽상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결혼, 하면 정말 행복할까? 띠동갑 우영 씨와 재년 씨의 ‘결혼 허들 넘기’ 다큐 영화 <나비와 바다>는 결혼이란 무엇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김기림의 시(詩) ‘바다와 나비’를 보고 영화의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시적이면서 색다른 접근이다. 이렇게 여운이 많이 남을 줄은 몰랐다. 뇌성마비와 뇌병변장애가 있는 커플이어서가 아니다. 결혼에 대해 이처럼 환상이 걷힌 적나라한 진심과 현실을 다룬 영화는 보기 드물다. 결국은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박배일 감독 스스로도 “이렇게 끝날 줄 몰랐다.”고 인터뷰를 한 바 있다. 당연히 해피엔딩, 인데 왜 보고 나면 생각이 많아지는 것인지는 보면 안다.

▲ 노재년(왼쪽)-강우영(오른쪽) 부부
사실 꽤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화다. 자연스러운 웃음도 곳곳에 스며 있다. 소소한 재미가 있다. 소꿉놀이하듯 연애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만인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는 ‘해피엔딩 스토리’는 흐뭇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 한쪽을 잡고 늘어지는지 모르겠다. 신기한 영화다. 그들 사랑의 진심에 대해서는 관객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어찌나 사랑하고 서로 위하는지 부럽고 애틋하다. 정말 사랑하면 저렇구나 하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손짓 발짓 눈짓 그 모두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혼이 “우리 둘이서 행복하게”만은 아니라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한다. 왜 대다수의 ‘로맨스'를 볼 때는 그리도 잘 되던 몰입과 판타지가, 이 영화를 볼 때는 안 되는 것일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동안 살던 방식을 버리고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하는 사회의 요구가 얼마나 심한 중압감을 주는지, 왜 마치 처음 깨달은 듯이 놀라울까. 영화는 덤덤한데, 관객은 눈을 크게 뜨게 된다. 사랑과 현실이 한 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팽팽하게 줄다리기 하는 치열한 현장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매일 넘어지고 다시 그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야 하는, 달걀 하나를 밥그릇에 깨 먹는 것도 그렇게 수고로울 수밖에 없는 그들이 아닌가. 결혼이라는 전혀 새로운 ‘파도’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뉘라서 저 파도가 두렵지 않을까.

물론 강우영-노재년 부부는 잘 헤쳐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한결같이 그래 왔듯이. 문제는 환상을 걷어버린 맨얼굴과 맨바닥에서 관객이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저 부부는  정호승의 시구처럼 ' 결혼을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지, 결혼을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준비했는지를 되묻게 한다. ‘장애’가 없다는 것만으로 ‘사랑하니까’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그 모든 준비를 소홀히 여긴 이들에게 그들의 결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비와 바다>는 결혼이 얼마나 가부장제에 걸맞게 정비된 ‘시스템’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연인과 ‘신부(新婦)’는 대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갑자기 우시장의 소라도 된 것 같은 난감한 상황도 맞게 된다. 다들 ‘그러려니’하며 절차로 진행하는 것들 사이에 꼭 낀 ‘나비’ 신세인 재년 씨, 그 ‘수심(水深)을 알 수 없는 기계적 시스템에 ‘나비’의 날개가 젖어가는 것을 우리는 결혼의 당연한 과정으로 여겨온 것은 아닐까.

아무도 기쁠 수 없다면, 이제는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연한 듯한 주례사와 당연한 듯한 절차들, 당연한 듯한 ‘남편’과 ‘아줌마’의 역할 배분론에 대해서 말이다. 저 속 모를 심연을 무사히 건너 바라던 ‘청무밭’에 닿을 때까지, 나비들의 날갯짓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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