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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정 따윈 필요 없어
한수진 기자  |  sj1110@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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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2.07  11: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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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붙은 파리를 떼어낼 힘도 없이 굶주린 아프리카 난민촌 아이가 텔레비전에 등장한다. “2천 원이면 이 아이에게 하루 세끼의 식사를 줄 수 있습니다.” 지갑을 열게 하려면 최대한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겠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공익광고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눈물짓는 아이의 눈빛이 선진국에 사는 이들의 마음속에 숨어있던 착함을 끄집어내 돈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프리카 사람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프리카는 힘없고 가난한 곳, 대책 없이 전쟁이나 하는 검은 땅덩어리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프리카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고 지갑을 여는 이는 도움을 주는 주체가 된다. 도움 받는 자와 도움 주는 자 사이의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도움 받는 자와 도움 주는 자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

얼마 전, 삼성 직업병 피해자 이소정 씨의 인터뷰를 앞두고 자료를 읽으면서도 이와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다. 대부분의 언론에서 소정 씨를 비롯한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비슷했다. 집이 가난해서 대학을 포기하고 삼성전자에 입사해 힘들게 일을 했다가 불치병에 걸려 오랜 투병생활을 하는 외로운 여자아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불의한 일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에 ‘불쌍한 반도체 공장 소녀’라는 이미지를 내세웠을 테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타인의 시선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리 몸이 아픈 사람이라도 하루 종일 아픈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막상 소정 씨와 만날 시간이 다가오니 여느 취재원들을 만날 때와는 다른 부담감이 커졌다. 불치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내 또래의 젊은 여성을 만나본 적이 없던 나는 혹시나 나의 무신경함이나 무지로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나 역시도 아직 만나보지 못한 그를 아프고 힘들고 연약한, 그래서 더 예민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내 말투와 옷차림 하나까지 신경을 쓰면서 긴장을 놓지 못했다. 내가 머릿속에 그려 넣은 휠체어를 탄 왜소한 여성은 ‘당신은 나보다 건강하고 가진 것이 많으니 나를 배려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그러나 병실에 들어서서 소정 씨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들은 하얗게 지워졌다. ‘반전(反轉)’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지? 그는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사실 그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 고르고 고르다 <요츠바랑>이라는 명랑 만화책을 골랐는데, 바로 그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상이었다. 마른 몸에 환자복을 입고 있지만,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한, 혼자서 손톱을 깎기도 힘들다고 말하지만, 휠체어로 병원 복도를 휘젓고 다니고도 남을 에너지가 느껴졌다.

“동정받기 위해, 위로받기 위해 글을 쓰는 게 아냐”

이전에 다른 인터뷰를 하고 나서 몸이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혹시 인터뷰를 하다가 몸이 안 좋아지면 전화로 보충 취재를 하면 되니 꼭 이야기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그는 통증을 참으면서 한 시간을 꼬박 채웠다. 전날 아파서 잠을 못 자고 밤을 새웠다면 서도 “저 지금 레드불(에너지 드링크)이예요”라며 오히려 기사 쓰기 힘들겠다고 내 걱정을 해줬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트위터에 남겼던 글이 떠올랐다. “글을 쓰는 이유는.. 동정 받기 위해.. 위로 받기 위해.. 나의 비참함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저.. 내 잘못이라 내 짐이라 생각하는.. 또 다른 내가 없길 바래..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는 것뿐입니다 부탁합니다. 들어주세요.” (이소정 트위터 @sojungume) 내가 상상했던 이소정은 내 편견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다른 이들이 만든 이미지였지, 소정 씨 자신이 원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소정 씨와 대화를 나눈 시간은 친구의 병문안을 온 것처럼 즐거웠다. 대화의 내용은 종종 아프고 답이 보이지 않았지만, 소정 씨는 여유가 있었고 유머를 아는 친구였다. 나는 그와의 대화에 얼마나 빠져들었던지 기사에 쓸 사진을 찍는 것도 잊은 채 병원을 나와 버렸다. 소정 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너무 멀리 간 건 아니냐며 천천히 오라고 했다. 나의 어리바리함을 들킨 것이 조금 창피하기도 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첫 신호이니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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