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설, 루카 12, 35-40.

설 명절입니다. 음력을 사용하던 옛날에는 오늘이 새해의 첫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양력을 사용하는 오늘, 해가 바뀐 것은 1월 1입니다. 이중(二重)과세를 하자고 있는 설 명절은 아닐 것입니다. 세계는 하나의 생활권이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만 음력 과세를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설 명절에 조상에게 차례를 올렸습니다. 설 명절이 공휴일이 되면서 그 점이 더 부각되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서 차례를 올리지 않는 사람들도 미사를 봉헌하며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합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지만, 우리의 삶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십니다. 그분들과의 인연이 있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습니다. 그분들은 떠나가셨지만, 우리는 그분들과의 어떤 연대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분들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분들과 맺었던 우리의 인연이 소중하고 은혜롭게 기억되는 그만큼, 우리는 오늘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그분들과의 소중한 인연을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보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을 생각하면, 그분들로부터 우리 안에 흐르는 사랑과 헌신의 삶을 다시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분들도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비정하고 힘든 세상을 각자 사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분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이 살고 가신 사랑과 섬김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사랑과 섬김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오늘 다시 바라봅니다. 그것이 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말합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세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등불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종과 같은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은 힘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는 우리 위주로 행동하지 않아서 이루어지는 중요한 일들이 많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지 않아서 자녀가 성장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웁니다. 노쇠한 부모를 모시는 자녀도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지 않습니다.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가 또한 그러합니다. 예술가의 작품 활동도 그렇고, 우리가 하는 공부나 노동도 그것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에 전념 헌신해서 성취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중요한 일들은 모두 우리 위주로 편하게 살아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잊고, 헌신하여 이루어낸 일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헌신과 섬김을 실천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높이거나 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마르 8,11)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한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단순히 실천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적의(敵意)나 그 사회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도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켜서 당신 스스로 잘 되는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사람들에게 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분으로 처신하면서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요 선생인 내가 그대들의 발을 씻었다면 그대들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행한 대로 그대들도 행하도록 나는 본을 보였습니다.” 요한복음서(13, 14-15)의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그분의 섬김을 우리가 배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섬김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그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는 몸짓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흩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살듯이,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도 세상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실천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각자 허리에 띠를 띠고, 복음의 등불을 밝히고 나서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신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을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하겠다는 마음은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겠다는 마음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분이라, 부모들은 역경을 딛고도, 자녀를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자녀들은 노쇠한 부모들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스승들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고, 선배들은 후배들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원하였던, 혹은 원치 않았던, 모두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정성을 은혜로운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의 흐름에 우리가 합류하는 일입니다.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이 실천하신 선과 자비는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들을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실천하신 은혜로움이 있어 하느님이 인류역사 안에 살아계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이 세상 안에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체면치레나 허세도 아니고, 독선도 아닙니다. 허리에 띠를 띤 종이라는 말은 체면치레나 허세를 찾는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헌신적으로 살겠다고 마음 다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고 넘쳐흐르게 하겠다는 마음 다짐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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