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철의 언론과 교회

 

2007년 8월부터 시작한 ‘미디어흘겨보기’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www.catholicnews.co.kr)의 홈페이지 개통에 따라 꼭지명을 ‘언론과 교회’로 바꾸고 현재의 미디어 비평을 포함한 언론에 비친 교회의 모습을 다루고자합니다. 많은 격려 바랍니다.
 

 

2008년 5월 2일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거리에 앉았다. 한 달이 지난 6월 10일에도 여학생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난 7월 5일에도 여학생들은 거리에 그대로 있었다. 여학생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젖먹이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도 있고, 고등학생, 대학생도 있었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취업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함께 거리에 있었다. 시민운동가와 정치인도 물론 있었다. 노인과 장애인과 성직자가 함께 손을 잡고 무엇인가를 높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품은 것은 각자의 모습만큼이나 다를지라도 그들이 함께 든 ‘촛불’의 여린 불빛은 강한 세상의 힘을 녹이고 있었다. 그곳에 ‘촛불’이 있었다.

촛불 없는 곳에 교회신문이?

가톨릭교회를 대내외에 알리는 대표적인 교계신문은 1927년에 창간하여 8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가톨릭신문>과 사회민주화의 기운에 힘입어 새로운 교회언론을 표방하며 1988년에 창간되어 올해 20살 성년을 맞이한 <평화신문>이 있다. 교계신문에 관한 이야기를 풀기 전에 한마디를 미리 던지고 들어가자. 두 신문에는 2008년 한국 사회를 격동하게 만들었던 ‘촛불’에 관한 분석기사는 계절이 세 번 바뀌도록 유감스럽지만 없었다. ‘촛불’없는 그곳에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신문이 있다.

2008년 7월 2일자 <한겨레> 8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2008년의 한복판에서 한국 사회의 최고 화두는 단연 ‘촛불’이다. 세상을 바꾸고 있는 촛불의 의미는 무엇이며, 촛불은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가?” 세상은 촛불의 진화까지 고민하고 있는데 시대가 세상 앞에 던진 화두를 붙들지도, 복음적 시각으로 맞대고 응시하지도 못하는 ‘교계신문’은 누구이며, 무슨 생각을 하며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가?

<한겨레>을 인용했다고 시중의 일간신문과 종교 주간신문을 견주어보자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무엇을 언론이라고 하는가? 언론학자의 학술적 설명이 필요한 곳은 학교나 연구소이지 거리가 아니다. 거리로 통칭되는 세간에서 무엇을 언론이라고 부르는가? 수많은 종류의 언론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문’이란 형태다.

신문매체의 여론 선도력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신문’이란 용어를 쓸 바에는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언론의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본 중의 기본이란 말이다. “우리는 종교지인데…” 또는 “우리는 주간신문인데…”, 더더욱 ‘정교분리’운운은 한심한 핑계일 뿐이다. 그럴 것 같으면 신문이란 언론의 기능을 포기하고 그냥 가톨릭 교회 소식으로 하거나 전국 교구 주보연합 또는 천주교회보가 어울릴 것이다. 하기야 가톨릭신문의 창간 당시 제호가 <천주교회보>인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더 솔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의 비극인가 교회언론의 비극인가

아프지만 돌이켜보자. 1980년 5월 18일 민족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광주민주화운동 아니 진압군의 용어로 ‘폭도들에 의한 광주사태’가 있었다.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전무하고, 후무해야 할 일을 신군부세력이 벌였다. 당시의 언론이 ‘광주’라는 도시 이름조차 쓸 수 없는 꿀 먹은 벙어리로 지낸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때 한국 천주교회의 유일한 신문이었던 <가톨릭신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광주학살이 펼쳐진 지 2주 뒤 1980년 6월 1일자(1207호) <가톨릭신문>은 조심스럽게 광주를 지면에 올렸다. 그때 기사를 지금 다시 보면 눈물이 난다. 아니 차라리 웃음이 난다. ‘광주 성직자․수도자 전원 무사’(1면 머리기사). 부끄러울 뿐이다.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 언론의 관점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석 달이 채 지나기 전인 8월 31일자(1219호) 1면 머리기사에 전두환 국가보위 비상대책위 상임위원장이란 긴 직책을 가진 사람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제일성으로 말한 ‘사심 없이 주어진 책무 완수’란 기사가 실린다. 일주일 뒤 9월 7일자(1220호) 1면 머리기사에도 이어진다. ‘민주복지국가 건설에 총력 다짐.’ 특이한 상황에서 나오는 대단한 순발력이다. 같은 날 2면에 실린 “민주 ․ 복지 ․ 정의의 나라 -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새 국가원수로 취임하게 된 것을 온 국민과 더불어 경하해 마지않으며 새 영도자를 중심으로 미래의 민족과 조국의 영광을 위해 새 역사의 장을 펼쳐가게 된 우리 국민은 이제 안정과 번영과 희망에 부풀어있다.’로 써내려간 사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

독자이자 천주교인들을 교계신문은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이런 기사를 당당히 실었던 당시 가톨릭신문의 사장 신부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신부는 이후 국가보위입법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등 지난 세월의 질곡마다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기관지인 <경향잡지>가 이런 이상한 순발력의 선두에 있었음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역사가 비극인가, 교회언론이 비극인가? 아무리 바른 말을 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할지라도 교회 언론마저도 그러해야 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질문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같은 비중으로 던져져야만 한다.
 


소통 않는 교회언론의 일방통행

한마디로 소통의 부재이며 실종이다. 독자에 대한 배려 없는 언론, 일방통행에 가까운 소식전달, 독자와 언론매체 간 뉴스 가치판단에 대한 좁힐 수 없는 간격 등은 천주교인 독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가? 박수는 있지만 감동 없는 언론, 뉴스는 있지만 이슈 없는 언론, 교리는 있지만 예수 없는 교회언론에 다가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그동안 ‘미디어 흘겨보기’라는 교계신문 비평을 진행해 왔다. 일반 언론들은 언젠가부터 독자위원회, 지면평가위원회, 시민편집인 등을 구성했다. 그것은 외적 형식도 있지만 독자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현재의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에도 그런 기구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신문을 통해 자체 평가한 것을 본 기억은 없다. 아무튼 1년간 신문사의 청하지 않은 무료평가서를 매주 게재했지만 바뀐 것은 돌침대 광고 형식 하나에 불과하다. 여전히 소귀에 경 읽기다. 바위에 계란 던지기다. 아니 맨땅에 헤딩이다. 어쩌면 외부 평가에 대한 인색함과 열린 마음으로 듣지 못하는 지금의 모습은 그간 교계신문으로서는 겪어보지 못한 생경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미디어 흘겨보기 5호(2007.9.2)에 이런 글을 실었다. ‘<가톨릭신문>에는 있는데 <평화신문>에는 없는 것을 아시나요?’-“현재의 두 신문이 모든 면에서 흡사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특이하게도 여론면에서는 차이점이 있다. 여론면은 통상 데스크와 외부 필진의 칼럼과 독자투고로 이루어진다. 평화신문 홈페이지의 검색이 틀리지 않다면 <평화신문>에도 독자마당과 평화네거리 칼럼, 시사진단과 데스크 칼럼이 있었다. 아마도 몇 번의 지면 개편을 하면서 2006년 8월에는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보니 아래 문구가 <가톨릭신문>에는 있지만 <평화신문>에는 없다.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론면이 없는 평화신문은 정론지로서는 큰 결함이다.”

독자 또는 외부인의 평가나 여론을 듣지 않으려는 신문사. 여론이 있다 하여도 논쟁을 회피하고 좋은 생각만을 운운하는 여론을 담은 신문은 어쩌면 한국 천주교회의 어제이자 오늘의 모습일 수 있다.

‘거울’과 ‘등불’이 되는 교회언론을 희망한다

아래는 <가톨릭신문> 창간 81주년 2008월 3월 30일자(2592호)에 실린 창간 기념사 중 일부이다. “저희는 가톨릭신문이 교회의 ‘기관지’임을 자임합니다. … 그러나 저희가 말하고 지향하는 기관지는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과 실수까지도 덮거나 미화하는 구태를 행하는 그러한 시대착오적인 나팔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기관지는 교회 안의 거룩한 권위에 따라 전해지는 교회의 가르침을 알려주며, 가치관의 부재 속에서 참된 권위와 가치를 지닌 것을 식별해 주며, 사람의 가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전파한다는 의미에서 기관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신문은 그 참된 의미에서 기관지로서의 소명을 더욱 충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신문> 창간 20주년 2008년 5월 18일자(970호)에 실린 창간 기념사도 있다. “문화가 없습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물질만능, 황금만능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사람이기 위해 우리는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평화신문은 험악한 이 ‘동물의 왕국’에서 ‘기쁜 소식’을 찾아 전함으로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하여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두 사장 신부가 신문사를 대표하여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독자가 열린 마음으로 신문사의 지향점을 받아들이듯 신문사도 독자들의 구독 원의를 파악하고 특수 관계자의 언론이 아닌 모두의 언론이 되길 기대한다. 무엇보다 교회의 언론이 ‘거울’과 ‘등불’이 되어 한국 천주교회가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교우들이 교우관계를 넘어 ‘신자’가 될 수 있도록 깃발의 역할을 다하여야 한다.

기존의 교회언론이 못하는 점을 보완하는 대안언론이 아니라 다양함 속의 일치를 이루는 대안언론도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큰 키와 작은 키를 비교하지 말자. 단지 어울리지 않는 큰 옷을 입은 작은 키나, 작은 옷을 입은 큰 키에 대한 지적에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독자들에게 통보하는 시각이 아니라 독자와 소통하는 신문사의 보도관점과 지향점을 만들어야 한다. 때로는 멀쩡히 신문사의 이념을 밝혀놓고는 다시 원래 모습의 ‘받아쓰는’ 기관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동물의 왕국’을 방관하는 유유자적은 교회언론이 가야할 길이 아닌 것이다.

언론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다. 비춰주는 창이 굴절되면 결국 우리의 삶이 뒤틀리게 된다. 더더욱 우리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아닌가? 교회언론을 언론이게 하는 것은 교회당국과 독자들의 몫이다. 서로가 깨어있어야 하는 것은 여기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아직도 교회언론에 거는 기대가 크다.

 

김유철/스테파노, 평범한 밥벌이를 하면서 경남민언련 이사,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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