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천주교인권위원회 운영위원 설현천 변호사

"인권 변호사라는 말은 없다. 모든 변호사는 인권의식을 기본으로 가져야 한다."

설현천 변호사는 ‘인권 변호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인권 변호사란 단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도와주는 변호사들을 그렇게 부르지만, 변호사라는 역할 속에는 이미 기본적으로 인간의 권리를 도모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 설현천 변호사. 그는 "얼마전 연수원 동기를 인권위에서 만났다. 정말 반가웠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누군가의 손을 이쪽으로 이끌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며 "앞으로 인권을 위한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어릴 적부터 그는 법관을 꿈꿨다. 그의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에게만은 “판사가 돼라”고 자주 당부했다. 어머니의 당부는 곧 그의 꿈이 됐다. 유아세례를 받고 성당 마당에서 자라다시피 한 그에게 본당 신부님들 역시 “너는 꼭 훌륭한 인권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고 일렀다. 주변 사람들의 바람이 주문처럼 된 걸까, 그는 어느새 가장 많이 이야기 들었던 김형태 변호사와 함께 천주교인권위원회(이하 천주교인권위)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반전 있는 여정, 반전 있는 변호사
연수원 졸업 직전, 우연히 몸담게 된 천주교인권위원회

그는 사실 인권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 되고 싶었던 것도 변호사가 아니라 판사였다. 그의 가슴 속에 이상처럼 남아 있는 법관의 상은 이렇다. 정의롭고 곧으며 매와 같은 기상을 가진 수도자와 같은 법관, 법과 사람, 세상에 대해 깊이 이해할 줄 아는 그런 법관이 그의 꿈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성적이 안 돼서" 변호사가 된 후에 단 한 번 주어지는 판사 지원에 응시했지만 떨어졌다며 멋쩍게 웃었다.

천주교인권위와 맺은 인연도 우연에 우연이 거듭된 결과다. 2006년 연수원 졸업반 당시 연수원 내 가톨릭 신자들의 모임인 교우회 회장이 점심 초대를 했다. 가톨릭법조회 식사 모임이었다. 그 자리에서 우연히 박경용 변호사가 인권위원회 법률상담에 대신 나가달라고 부탁했다.

흔쾌히 받아들이고 첫 상담에 나갔고, 기획부동산 사기에 휘말려 퇴직금을 몽땅 잃은 한 노부부의 재판을 도왔다. 그 상담이 끝난 후, 그의 발목을 영원히 잡은 것은 “계속 법률상담 하실거죠?”라며 당연하다는 듯 시간표를 건넨 천주교인권위 김덕진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늦깎이라고 했다. 대학은 세 번, 사법고시는 열 번 정도 실패했다. 홀로 사무실을 꾸린 지 7년째를 맞지만, 남들이 전문영역을 개척하는 동안 여전히 그는 ‘만물상’ 변호사를 자처한다. ‘00 전문 변호사’라는 간판을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가 누군가 자신에게 “설 변호사는 그것 하나는 최고다”라고 평가할 때까지 전문 변호사라는 호칭은 어불성설이라는 게 지론이다.

▲ 개업한 지 2년 후, 6개월 간 사건 의뢰가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마음을 다잡기 위해 홀로 사무실에서 그야말로 붓 가는대로 글씨를 썼다고 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시편 137편이다. ©정현진 기자

천주교인권위 교회사업팀장 맡아..."세상에 대한 관심 끊는 교회, 안타깝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의 현장 돌봐야

천주교인권위 활동 역시 준비 없이 접했지만, 자신만의 포부로 활동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 운영위원으로 작년부터 ‘교회사업팀장’을 맡은 그는 “그동안 게을렀던 활동에 조금 더 박차를 가해 볼 요량”이라면서, “천주교 단체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교회 사안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사업팀에서는 앞으로 일상적으로 교회 인권단체의 정체성을 더 확실히 하고 색깔을 찾아가는 활동을 해나갈 것”이라고 의욕을 드러냈다.

설현천 변호사는 천주교인권위가 전문 영역에서 해야 할 몫이 있겠지만, ‘인권’을 위한 활동이 어느 특정 단체의 몫이어서는 안된다면서, “한국 가톨릭이 전반적으로 보수화되면서 현세 구복적 신앙이 강조되는 동시에 인권 감수성이 퇴보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종교가 성공과 부를 보장하는 상품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성경에서 명백하게 예수님의 뜻을 실현하는 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자기 한 몸의 평화와 성공을 위한 종교가 되면서 가장 먼저 이뤄지는 일은 세상사에 관한 관심을 버리는 일이죠.”

그는 인권위원회와 교회 모두에게 ‘지금, 여기’의 인권을 살펴야 한다고 주문했다.

설 변호사는 “예를 들면 군의문사 규명의 경우, 과거 억울하게 묻혀버린 20년, 10년 전의 군의문사 규명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른바 ‘천안함 사건’도 군의문사라고 보고, 그것이 또 먼 과거의 일이 되기 전에 진상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교회가 생명운동, 낙태반대, 사형제도폐지 등에 앞장서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외에 지금 당장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 공권력에 희생당하는 이들을 외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면서 지금 바로 옆에서 외면당하는 생명, 인권에 대해 무엇이든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례분과 부위원장 설현천 사도요한
"하느님나라에 들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외할머님의 위로

사무실에 놓인 고운 십자고상을 보면서 그의 신앙생활이 궁금했다.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그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

“늘 기억나는 순간이 있어요. 독실하셨던 외할머님이 기도하시다가 문득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죠. ‘요한아, 하느님을 믿고 착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구슬치기를 좋아하던 평범한 아이였는데, 유독 구슬을 따기 위해서 친구들을 속이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어요. 생각해보니 봉헌금으로 오락실을 간 적도 많고...그래서 내심 ‘그렇게 잘못을 많이 했으니 천국 가긴 글렀다’고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이요...(웃음) 그런데 할머니께 여쭤보니 지금부터 기도 열심히 하면 괜찮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아직도 저에게 위안이 됩니다.”

▲ 사무실에 놓인 십자고상. 처음에는 예수님을 놓고 장사하는 것 같아 성물을 두지 않았지만 어느 의뢰인의 선물이라 모셔두게 됐다. ©정현진 기자

스스로 구복신앙을 경계하는 그가 여전히 위안으로 삼고 있는 말은 ‘천국’이 아니라 ‘아직 늦지 않았다’는 메시지였다.

그는 서울대교구 반포4동 본당에 적을 두고 있다. 청년분과장을 3년 했고, 지금은 전례 분과 부위원장이다. 본당 임원을 맡은 경우, 보통 주말과 주일, 평일에도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본당 활동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공약 이행 중”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하느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번 시험에 실패했던 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원하는 것을 이뤄주신다면 당신을 위해 열심히 살겠노라”고 기도했다. 하느님이 약속대로 이뤄주셨으니 이제는 그때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내가 가진 능력과 시간으로 십일조를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전했다.

나의 십일조, 가진 능력과 시간의 10분의 1만큼 인권 활동을 위해...

설현천 변호사의 십일조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시간을 인권 활동에 쓰자는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많은 것들을 갚아나가는 자기만의 봉헌이라는 의미다.

그는 “훌륭한 인권 변호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하루 시간과 에너지 중 10분의 1만큼은 타인을 위해 쓰일 수 있도록 애쓸 것이고, 다만 그 시간이 억지로 의무방어전처럼 흘러가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붓글씨를 배우고, 5월에는 그동안 써왔던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시”라고 평하는 자작시로 시집을 내겠다고도 한다. 인터뷰를 마친 다음, 천주교인권위 20주년 행사 준비를 위한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며 길을 서둘렀다. 그는 훌륭한 인권 변호사가 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먼 훗날, 그가 많은 이들에게 인권 만물 변호사, 인권계의 만물박사로 불리는 날이 오기를 빌어주기로 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