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무용(無用)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꽃, 노래 그리고 시(詩)...
군대 간 애인 첫 면회에 먹을 것이 아닌 안개꽃 한 다발을 안고 가는 마음...
현실이 아무리 냉엄하게 기계적으로 돌아갈지라도, 이 무력한 빈손을 어쩌지 못해 한 자루의 촛불을 켜드는 일...

무용(無用)하기에, 그 쓸모없음으로밖에는 달리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그 어떤 뜨거움. 종종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찾아오기도 하지만, 일단 시작되면 “빠져나갈 길은 없”고 “닫을 수 없는 문이 열리”기도 하는 그것 말이다.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여기 서른여덟 살의 한 남자가 있다. 여섯 살에 소아마비를 앓고 전신마비가 된 마크 오브라이언. 그는 시인이고 칼럼니스트고 대단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다. 하지만 그 자유로운 정신은, 오직 머리 밖에는 움직이지 못하는 몸에 갇혀 호흡기가 달린 철제 침대에서 지내야 한다. 시인의 삶이란 게 “온종일 자신의 머릿속에서 사는 것”이라는 그의 말마따나 시인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만은 혼자서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의 열망이 간절할수록 절망은 더욱 깊어진다. 예민하고 자존심 강한 이 남자는 그 자의식이 점차 심한 죄의식으로 옮아가면서 살고 싶은 의지마저 꺾여 간다.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The Sessions, 2012)은 이런 마크(존 혹스 분)의 이야기다. 여인에 대한 사랑은 애초에 신이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그. 주어질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자신의 죄악을 신부님께 고해성사 드리는 것으로 아픈 마음을 달래던 그. 그런데 어느 날 성당에서 새로 부임한 브렌든 신부(윌리엄 H 머시 분)를 만나게 되면서, 신부님의 ‘비공식적’ 조언과 보속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다. 브렌든 신부님과의 솔직한 고해성사 내용이 어찌나 심각하고 어찌나 웃기는지, 관객도 마크를 속으로 힘껏 응원하게 된다.

처음엔 비록 중증 장애인이지만 “나도 힘이 있다”를 확인하고 싶은 정도였던 이 ‘고해’는, 결국 신부님 앞에서 오랜 소망을 토로하는 데 이른다. ‘남자’가 되고 싶은 꿈, ‘남자로서’ 사랑받고 싶은 꿈. 꿈꾸는 것만으로도 “쾌락 대신 굴욕감과 수치심만 드는”,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

마침내 곤혹스러움과 공감 사이를 넘나들던 신부님마저 ‘공식’ ‘비공식’을 가리지 않고 마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면서, 그의 사랑을 위한 노력은 점차 구체성을 띠게 된다. 그리고 이윽고 섹스 트라피스트 셰릴(헬렌 헌트 분)를 만나면서 사랑을 위한 ‘여정’은 그의 인생을 온통 흔들어 놓게 된다. 놀라지 마시라!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모든 등장인물은 실존인물이다. 저 매력적인 신부님까지도!

누구나... 사랑할 수 있기 위하여

마크가 진정한 사랑을 체험할 수 있으려면, 세상이 그렇게 비정한 곳이어서는 안 된다. 꽤나 온정적인 곳이어야, 이렇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 배려가 돌아오는 법이다. <세션>은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 한 사람의 ‘남자로 살고 싶은’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서 온 세상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대하고 열렬히 서로 돕는지! 그 섬세하고 조밀한 도움의 그물망 때문에 보고 나면 한숨이 다 나온다. 저기는 천국인가?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가 감히 꿈꾸는 것조차 송구스러운?

숨 쉬는 것조차 자력으로는 어려운 마크의 ‘당당한 호모 사피엔스’가 되고자 하는 소망에까지 귀를 기울여 주는 사회. 그의 ‘데이트’ 혹은 ‘세션’이 성사되려면 가는 곳마다 여러 명의 조력자가 나서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마치 당연한 듯이 척척 이루어지는 사회. 누구라도 그런 세상에서라면 살고 사랑하고 꿈꾸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시를 써서 바치고, 더 이상 미안해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리 중증 장애인이라도, 남자와 여자로서의 욕망이 있다. 남자로서 여자로서 사랑 받고 싶은 소망은 당연히 인정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 그런 데까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웬만하면 가리고 덮어두고 싶어 한다. 없는 척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한다. 이렇게 ‘함께 살기’를 불편하게 느끼는 사회에서, 비장애인이라고 해서 ‘사랑’이 딱히 자유롭고 편할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민망해질 뿐이다.

우리의 현실은 아직 장애인의 활동권도 제대로 보장 못 받고 있다. 활동보조인 제도를 24시간 보장해 달라는 간절한 목소리마저 정치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사람을 기계적으로 ‘부위별’로 나누고 옥죄는 장애등급제의 족쇄는 풀릴 줄 모른다. 장애인이 영화 관람조차 편히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세션>은 어쩌면 너무도 꿈같은 이야기 같기도 하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에 무뎌져 가고 있다. 장애인들이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던 후보 대신, 장애인에 대한 아무런 공약(公約)도 없었던 후보가 차기 정부를 인수받게 되면서 상황은 더 암담하다. 장애인들은 언제까지 ‘마음으로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가려운 코끝 때문에 밤새도록 잠을 설치면서도, 혼자 남겨진 밤에 화재의 불안 속에 시달리면서도, “집중하자. 마음으로 긁는 거야.” 따위의 시적인 관념으로 달래야 하는 것인가. 정녕 답은 없는가.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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