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7일 (연중 제3주일) 루가 1,1-4; 4,14-2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어느 안식일에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성서를 낭독하신 이야기입니다. 낭독하신 것은 이사야서(61,1-2; 58,6)의 몇 구절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낭독을 들은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첫머리에서 복음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그분의 제자 되어 그분의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이 있었고, 자기는 그 기록 외에도 자기 자신이 따로 ‘살펴본’ 자료를 ‘순서대로’ 엮어서 복음서를 집필하였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기록으로 혹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정리하여 집필한 역사적 문서라는 것입니다.

루가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시작하게 엮었습니다. 그는 나자렛에서도 유대교 회당을 첫 복음 선포의 장소로 택합니다. 유대교를 모태로 발생한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게 한 것은 그 예언서의 말씀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잘 부합한다고 저자가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 곧 이 세상의 실패자들과 불행한 이들에게 메시아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식민지로 오랫동안 전전하면서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국권을 먼저 회복해 주고, 그들의 적을 “질그릇 부수듯이...짓부수어서”(시편 2,9) 이스라엘이 세상 만방을 다스리게 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상상하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일상의 모든 일 안에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손길을 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볕, 곡식을 자라게 하는 비, 들에 핀 꽃, 밭에 익어 가는 곡식, 이 모두가 그분에게는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들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생각할 때도 자기중심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식민지 신세를 면하게 해주는 메시아를 기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시험에 합격시켜주고, 사업을 성공시켜주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 높은 사람, 강한 사람 편에 서신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도 아니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런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 하느님은 몇몇 사람에게 권위와 성공을 보장해 주는 분입니다.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내는 하느님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셨다는 이사야서의 구절들은 하느님의 영이 내리자 모든 불행한 이들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는 말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선포하는 예수님이 인류역사 안에 나타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은 그 은혜로우심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스스로 실천하였습니다.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셨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를 긍정하면, 그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쉽게 부정합니다. 흑백(黑白) 논리입니다. 유대교는 율법 지키기를 권장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단죄하였습니다. 율법은 본시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자각하며,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인간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데에 필요한 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성전에 제물을 바치라고 강조하면서 제물 봉헌을 하지 못하는 이를 모두를 죄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제물 봉헌은 본시 자기가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베푸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에게도 그것이 은혜롭게 나누어지게 하는 의례였습니다. 우리는 결혼을 신성한 것이라 말하면서, 결혼 생활에 실패한 이들을 쉽게 외면합니다. 우리는 주일 미사가 중요하다 생각하면서, 그것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관행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의 흑백 논리로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공과 실패에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기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부모도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자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낭독하였다는 이사야서가 나열하는,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는 모두 실패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이 은혜로우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런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성공과 실패의 흑백 논리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논리가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논리를 벗어나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유일한 화두(話頭)가 있다면, 그것은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은혜로움을 실천하지 않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잊어버린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과 무관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잊어버린 유대교 기득권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21,31). 세리와 창녀는 율법 준수에 실패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도 내리셔서 우리도 성공과 실패라는 우리의 논리에서 벗어나,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참으로 자유로운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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